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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고개- 박준당신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이지금의 나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잔돌은 발로 차거나비자나무 열매를 주워들며답을 미루어도 숲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나는 한참 먼 이야기이를테면 수 년에 한 번씩미라가 되어가는 이의 시체를관에서 꺼내 새 옷을 갈아입힌다는어느 해안가 마을 사람들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서늘한 바람이무안해진 우리 곁으로 들었다 돌아나갔다어깨에 두르고 있던 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당신을 보았고그제야 당신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사람으로 같이 하지 않아도좋았을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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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11.2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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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작자미상啞啞天末亂鴉鳴 (아아천말란아명)하늘가 까마귀 떼 어지러이 울어대고木落瀟瀟似雨聲 (목락소소사우성)우수수 낙엽지는 소리 빗소리 같구나嚴月又來人又老 (엄월우래인우)추운 계절 돌아 오고 사람은 또 늙으니寒風愁起夕陽傾 (한풍수기석양경)찬 바람에 시름 일어 석양이 기우네- 立冬(입동)은 상강(霜降)과 소설(小雪)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이다. 양력 11월 7일이나 8일 무렵이다. 바야흐로 겨울이 시작되는 날이다.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농사에 힘쓴 소에게도 나누어주면서 1년을 마무리하는 제사를 올리고, 이날을 기준으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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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11.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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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박혜경창밖에 예인선이 정박해 있는 부두가 보였다그는 취한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며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부두로 걸어 나갔다나는 니가 상상한 존재일 뿐이야나는 너를 상상한적 없어너는 니가 상상하지 않았다고 상상하는구나창밖으로 예인선이 사라진 텅 빈 부두가 보였다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었다모래 운반선이 느리게 부두를 향해 다가왔다 - 박혜경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 중에서/ 파란/ 2025년나는 진화의 가장 위대한 힘은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상상하지 않았으면 새의 날개가 없었을 것이고, 상상하지 않았으면 고래는 다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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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10.2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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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전원책종이를 발기 발기 찢었다.돌아가는 길은 왜 그리 어두운지자꾸 길을 잃었는데길을 그리는 것이가능했을 지도 모를 흰 종이 한 장을찢어 한 웅큼까마득한 시간 너머로 날려 보냈다.조각난 종이들은 무참하게도깊은 어둠의 수렁으로 흩어져다시는 조립되지 못할 거였다.조립되어 길이 되지 못할 거였다.그러나 흰 종이인 채로 있었다면나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음을믿었을 터이므로얼마나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인가.다시 갈 수 없는 곳에서. - 전원책 시집 ‘슬픔에 관한 견해’ 중에서/ 청하/ 1991년굳이 양자역학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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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10.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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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박윤우늦은 밤 편의점은 안성탕면 너구리 신라면 빈 봉지처럼 납작해지기, 우유팩이나 삼각김밥처럼 유통기한에 쫓기기당근주스는 당근주스를 견디느라 붉고 누가 두고 간 비닐우산은 벽을 견디며 바닥을 적신다길 건너 은행이 ATM 코너 덕분에 빛날 때 분리수거 투입구는 붐빌대로 붐빈다새떼 따라왔는데 새가 안 보여!하바롭스크에서 보낸 여친의 선곡은 ‘끼노, 빅토르 최’의 이어폰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담배 한 갑을 건네는데 거스름돈을 잡아채는 자동차의 경적누가 또 이 야심한 밤에 스키드마크를 그리는 걸까시급 칠천오백삼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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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9.2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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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의 독백 — 사소단장(娑蘇斷章) - 서정주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서정주 시집 ‘신라초’ 중에서/ 은행나무/ 2019년사소는 신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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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9.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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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손미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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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8.2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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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가네- 천영애그리고 아니…그리운…홀연히…그리움…기뻐라…*메안더 무늬가 희미한 암포라에서 시간조차 너덜해진 양피지에서 늑골뼈 단정히 누운 시신을 보존하는 파피루스 조각에서 사포의 노래를 읊는다 노래는 존재했던 것을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될 것을 안다마른 모래 지층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찢어진 노래의 파편이 모래 사이로 퍼져 나간다… … …내 사랑 … … …네가 여기 있다면 네가 여기에 있기만 하다면* … … … - 천영애 시집 ‘말의 섶을 베다’ 중에서/ 파란시선/ 2025년*표시한 부분의 인용문은 그리스 시인 사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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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8.1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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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 이대흠먼 데 섬은 다 먹색이다들어가면 꽃섬이다-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중에서/ 창비/ 2010년짧은 시이지만 당연하고 그럴 것 같아서 아름답다. 섬은 그 외로움 때문인가? 섬에 대한 좋은 시는 다 짧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로는 정현종 시인의 ‘섬’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전문” 이 시는 섬의 외로움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외로움을 노래한다. 정현종의 섬과는 달리 이대흠의 섬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실체 그대로다. 그런데 정현종의 섬과는 방향이 거꾸로 이대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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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7.2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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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 길을 걸어갈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시선집 ‘수선화에게’ 중에서/비채/ 2015년“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구절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많은 변종 내지 패러디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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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7.1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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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장마- 정끝별새파란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 잠기고 뒤집힌다는 것 눈물 바다가 된다는 것 둥둥 뿌리 뽑힌다는 것 사태지고 두절된다는 것 물벼락 고기들이 창궐한다는 것 어린 낙과들이 바닥을 친다는 것 때로 사랑에 가까워진다는 것 울면, 쏟아질까? - 정끝별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 중에서/ 민음사/ 2005년휠체어에 의지해 집안을 다니시는 어머니는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항상 구르마(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보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고 낙이다. 그러다 갑자기 “비가 온다”라고 할 때가 있는데 그래서 밖을 보면 짱짱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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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6.2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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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 - 여성민이별한 후에는 뭘 할까 두부를 먹을까 숙희가 말했다내 방에서 잤고 우리는 많이 사랑했다신비로움에 대해 말해 봐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숙희는 말했다눈이 내렸을까 모르겠다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을 나는 모른다두부 속에 눈이 멈춘 풍경이 있다고두부 한 모에 예배당이 하나라고사랑하면 두부 속에 있는 느낌이야집에 두부가 없는 아침에 우리는 이별했다숙희도 두부를 먹었을까 나는 두부를 먹었다몸 깊은 곳으로소복소복 무너지는이별은 다 두부 같은 이별이었다 예배당 종소리 들으려고멈춘 풍경이 많았던사람이 죽을 때눈이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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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6.1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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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이수복이 비 그치면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푸르른 보리밭 길맑은 하늘에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이 비 그치면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시전집’ 중에서/ 현대문학/ 2009년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 시와 처음 마주했다. 국어선생님은 무조건 국어교과서 한 권을 통째로 외우길 권했다. 우리의 국어 시간은 그래서 통째로 시와 산문을 외우는 시간이었다.'상춘곡', '독립선언서', '청춘예찬' 등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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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5.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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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생각- 윤성근내가 짧은 능력과 식견으로 돼먹지 않은 두 편의미간행 장시를 발표한 것은 1980년대 말과1990년대 초, 나는 당신을 닮고 싶었던 것.그러나 될 일도 될 턱도 없어 가슴에 묻고예이츠도 키츠도 셰이머스 히니도 딜런 토마스도 아닌 많은 시인들 가운데 또 김수영도 정지용도 미당도 이상도 아닌그 숱한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유독 당신 하나만을칭송케 되었는데어느 해 크리스마스 무렵 술 취해 막 이사한 아파트를 못 찾아택시에서 내려 어추어추 30분 이상 헤맬 때당신의 시 의 일 절 우리가 부단히 애써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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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5.1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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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저녁- 고두현곰칫국밥 말아 먹다먼 바다 물소리 듣는데저녁상 가득 채우는달빛이 봉긋해라 가난한 밥상에도 바다는 찰랑대고모자라는 그릇 자리 둥근 달이 채워 주던그 밤의 숟가락 소리달그락거리며 쓰다듬던곳간의 밑바닥 소리 이제는 잔가시 골라 건넬어머니도 없구나- 고두현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 중에서/ 민음사/ 2015년단어(word)라는 것은 그 지시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앞 뒤 문장 요소들의 활용에 의해서 입체적이 된다. 어차피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면 이것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 시에는 그런 청각적 요소들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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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4.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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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최세목그것의 딱딱함.표면 고르지 않음.망치와 정을 허용하지 않음.고온에도 녹지 않음.사람의 팔로 안기에 너무 거대함.등등과그것을 파낸 언 땅.빛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지점.굴절되는 각도. 그림자의 정도.내부로 닫히는내부와 외부의 중간 지점에서다시 열리기도 하는점점복잡해지는 구조와관련한 계획. - 최세목 시집 『ㅊ』 중에서/_방1/ 2022년건축은 물질성을 통해 추상성을 포획하려 한다. 벽돌, 콘크리트, 철과 같은 구체적인 재료를 통해 공간이라는 추상성을 획득한다. 역으로, 그 추상성은 구체적인 물질성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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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4.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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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허둥대며 그가 말했다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십수년이 지난 요즈음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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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3.2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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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들- 이명우계약 만료 통보를 주자 그녀의 입에서 칼이 나온다그녀는 방문을 밀치고 들어와 자기랑 나이트클럽에 가자고 했다는 소문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소리에 공기가 깜짝 놀랐는지 책상 위 서양란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도 놀라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그녀의 입에서 계속 나쁜 공기들이 나오고그 속에 크고 작은 칼들이 숨어 있다.숨어 있던 바람이 맞아 맞장구친다.여직원들이 방을 노크할 때마다 숨을 곳이 보이지 않는다.칼을 숨긴 바람들이 와작와작그의 가슴으로 들어가고 있다.그녀와 잠을 잤을지도 몰라.사무실에 소문이 둥둥 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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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3.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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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 장무령누군가 테이블 앞에서 문득 일어났다나는 보지 못했다나의 입술은 거머리처럼 테이블에 붙어 있었다‘잘 가’라는 말보다 테이블은 정갈하고 달콤했다묵은 때처럼 침이 흘러 나왔다젖은 산책로에는 나대신 지렁이가 기어 다녔다새로 내린 커피에 각설탕처럼 손목이 녹아 내렸다입속엔 혀를 흉내 낸 혀가 있다식당 입구를 열면 거미가 내려왔다테이블에 앉아 음식 리스트를 읽는다거미줄에 감긴 식욕이 거미를 기다린다- 장무령 시집 ‘모르는 입술’ 중에서/ 청색종이/ 2024년정신분석학적으로 거식증은 음식물을 거부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음식보다 더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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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2.2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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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물의 세계 - 황성희구멍난 양말을 꿰매며, 구멍에게 진다엎질러진 물을 닦으며, 엎질러진에게 진다피 묻은 팬티를 빨며, 팬티에게 진다텅 빈 밥솥에 쌀을 안치며, 텅 빈에게 진다개수대 가득 설거지를 쌓아올린다욕실에 곰팡이 번지도록 그냥 둔다고무장갑 끼지 않고 이겨보려고유한락스 넣지 않고 이겨보려고텔레비전은 그러다가 켠다엄지를 가만 누르는 전원의 둥근 설득아홉시 뉴스가 전하는 사실들의 승전보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눈물을 닦지 않고 이겨보려다그만 훌쩍콧물을 들이마신다 - 황성희 시집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중에서/문학동네/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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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5.02.11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