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물의 세계  

- 황성희

구멍난 양말을 꿰매며, 구멍에게 진다
엎질러진 물을 닦으며, 엎질러진에게 진다

피 묻은 팬티를 빨며, 팬티에게 진다
텅 빈 밥솥에 쌀을 안치며, 텅 빈에게 진다

개수대 가득 설거지를 쌓아올린다
욕실에 곰팡이 번지도록 그냥 둔다

고무장갑 끼지 않고 이겨보려고
유한락스 넣지 않고 이겨보려고
텔레비전은 그러다가 켠다

엄지를 가만 누르는 전원의 둥근 설득
아홉시 뉴스가 전하는 사실들의 승전보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눈물을 닦지 않고 이겨보려다
그만 훌쩍
콧물을 들이마신다
 

- 황성희 시집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중에서/문학동네/ 2021년 

굳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작심한 것에 고작 삼일을 항거하지 못한다. 차라리 나쁜 일을 작심했다면 삼일을 넘기지 못하게 될 것을 기뻐라도 하겠지만, 우리가 마음먹는 일은 대부분 안타깝게도 (착하지는 않더라도) 무해한 것들이다. 다만 나의 의지가 허약해서만은 아니다. 이 풍요의 시대에 양말을 꿰매 신는 일조차도, 고무장갑을 끼는 일까지, 어마어마한 고행이 된 시대다. ‘풍요’라는 말에는 ‘행복’이 숨어 있어야 한다. 행복에 풍요가 숨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우리에게 풍요마저 또한 이겨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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