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는 목적이 아니라 진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
익숙하지 않는 낯설음 피하려는 것은 인지상정
미래를 예약하는 큰 그림 상상한다면 당장의 어색함 덮을 수 있을 것"
2003년 가을학기부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이번 학기는 12번째가 된다. 교수의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총장은 ‘정년이 9년 남으셨군요.’ 라고 인사를 건넸었다. 늦깎이 교수가 되다보니 사바티칼도 누리지 못하고 명예교수도 되지 못하는, 말 그대로 계약직의 시한부 교수가 된 셈이다.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이것저것 살피는 사이에 어느새 6학기만 남게 되었다. 일종의 대안학교였던 ‘서울건축학교’에서 만들었던 생각과 설계의 현장에서 느꼈던 문제들을 잔뜩 품고 대학의 일원이 되었으나 나이만 먹은 신임교수에게 학교는 낯선 곳이었다. 그동안의 시간이 나름으로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한 발 빠져서 돌아보면 무엇을 이루려 했고 그래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다. 밖에서 생각했던 문제들을 얼마나 풀었는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시도는 있었으나 어느 것도 결과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된 것도, 안 된 것도 없는’ 것이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가시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것은 노력의 효과가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 학과뿐만 아니라 대학이라는 조직과 있었던 논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묘한 상관관계 때문임을 알게 된다. 변화의 필요를 인정하고 모인 자리이지만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곧 이전의 가치가 그릇된 것임을 인정하는 격이 되므로 수용해야하는 쪽의 입장이 예민해진다. 역사와 전통이 탄탄한 경우에는 그 완고함으로 인해 대화는 더욱 힘들어진다. 수 십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적 가치에 그래서 매너리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기울이면 변화의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못한다. 대학이 시대적인 여건의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부정의 멍에를 스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가 마주앉는 구도에서 만들어지는 결과적인 절충은 한편 합리적인 것으로 여길지 모르나 변화의 내용은 본질이 희석되어 무늬만 남은 채 기존의 가치에 정당성을 보태는 장식이 되고 만다. 결국 만들어지는 결론은 이도저도 아닌, 하나마나한 모양이 되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경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건축문화를 바로세우기 위해 ‘새건축운동’으로 시작된 변화의 논의가 ‘건미준’과 ‘행정쇄신위원회’를 거쳐 ‘새건협’과 ‘선진화위원회’로 이어지는 동안 그 과정을 직접 간접으로 함께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수고를 들였지만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개혁과 수구는 여전히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관행은 요지부동이어서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변화의 필요성부터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쳐진 항목이 있더라도 시행과정에서 기존의 관행으로 곧장 변질되거나 탈색되어 괜한 규정만 덧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잘 해오고 있는 것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는 핀잔과 함께 그래서 무엇이 좋아졌는가라는 물음은 오히려 후배들에게서 쏟아졌었다.
건축의 기획에서부터 설계를 만들고 공사의 시행을 거쳐 완공하고 사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건축의 생산’이라고 본다면, 그 과정에 작용하는 사회적인 시스템은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건축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부실한 기획, 디자인도 엔지니어링도 보이지 않는 설계, 무차별로 집행되는 턴키 발주, 설계자를 배제하는 감리, 그래서 양산되는 ‘건축가 없는 건축들’, 부동산의 가치로만 존재하는 도시의 풍경 등등은 우리의 건축을 생산하는 시스템과 그것을 향유하는 문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수 십 년 동안 한해에 수 조원씩을 투자했음에도 아직 명품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는 어느 조달청 사무관의 고백은 가슴 한 곳을 찡하게 한다.
‘선진화위원회’가 ‘건축기본법’을 만들었고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작동을 시작했다. 지금 다듬어지고 있는 ‘건축정책기본계획’은 성안이 되면 우리의 건축문화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계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자체에까지 확산될 수많은 실천 항목들은 미래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으로 보았던 변화에 대한 반응을 예상하면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다. 변화를 향한 의도가 관행과 기득권에 묻혀 선언과 구호로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변화는 목적이 아니라 진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이다. 익숙하지 않는 낯설음을 피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미래를 예약하는 큰 그림을 상상한다면 당장의 어색함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변화의 내용이 어느 쪽에 유리할 것인지를 따지는 계산보다 변화의 방향이 어떤 진화를 이룰 것인지 살피는 지혜가 동원되지 않는다면 더 나은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지난해 가을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세계건축축제 WAF'에서 건축의 미래에 관한 포커스는 단연 중국에 맞춰지고 있었다. 일본에 뒤처지고 중국에 추월당하는 샌드위치의 지경은 우리건축이 세계무대에 서는 기회마저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진화를 도모해야 함에도 ‘삼단체통합’은 몇 년째 협상 중인데 난산이라고 한다. 온갖 이해관계와 기득권을 협상으로 푼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얽힌 매듭을 풀려고 마디마디를 시시콜콜 따지다보면 더욱 엉키기만 할뿐이다. 매듭은 푸는 것이 아니라 끊어야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칼질이 아니면 매듭은 풀리지 않는다. 건축문화의 진화는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