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해의 비경을 간직한 정동진 해안단구 탐방로

작하면서 인간은 길을 만드는 존재가 되었고, 그 길 위에서 인간은 문화를 만들어 예술을 창조하고 역사를 써내려간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그 비경의 아름다움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에서 ‘정동’은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경복궁)에서 정방향으로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심곡’은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정동진의 ‘부채 끝’ 지형과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의 모양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같아서, 강릉 출신 소설가 이순원 씨가 제안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지명이 선정되었다.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놓은 듯한 지역 특징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데다 동해의 깨끗하고 탁 트인 시원함을 강조해 부르기 쉽다는 평을 받았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지정된 곳이다. 2300만 년 전의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 해안단구로,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군부대의 경계 근무와 정찰용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던 기간이 있었다.

정동진 썬크루즈 주차장에서 심곡항 사이엔 약 2.86㎞의 탐방로가 조성되어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과 웅장한 기암괴석, 주상절리, 비탈에 아슬아슬하게 선 나무에서 오는 비경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절벽길은 날 것 그대로 바다의 광활함과 시원함, 파도소리가 오감을 깨우고, 수십 미터 절벽아래 파도치는 바다 위를 편안히 걷다보면 신선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든다.

심곡항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유명한 정동진 모래시계공원이 나온다. 정동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통일공원에 도착한다. 통일공원에는 1996년 안인진리 해안으로 침투하다가 좌초된 4000톤급 잠수함과 1999년까지 전투함으로 활약하다 퇴역한 전북함 등이 전시돼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인 등명락가사, 다양한 설치미술 작품들이 전시된 하슬라 아트월드 등도 이 해안도로에서 만날 수 있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에서 ‘정동’은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경복궁)에서 정방향으로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심곡’은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정동진의 ‘부채 끝’ 지형과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의 모양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같아서, 강릉 출신 소설가 이순원 씨가 제안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지명이 선정되었다.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놓은 듯한 지역 특징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데다 동해의 깨끗하고 탁 트인 시원함을 강조해 부르기 쉽다는 평을 받았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지정된 곳이다. 2300만 년 전의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 해안단구로,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군부대의 경계 근무와 정찰용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던 기간이 있었다.
정동진 썬크루즈 주차장에서 심곡항 사이엔 약 2.86㎞의 탐방로가 조성되어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과 웅장한 기암괴석, 주상절리, 비탈에 아슬아슬하게 선 나무에서 오는 비경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절벽길은 날 것 그대로 바다의 광활함과 시원함, 파도소리가 오감을 깨우고, 수십 미터 절벽아래 파도치는 바다 위를 편안히 걷다보면 신선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든다.

심곡항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유명한 정동진 모래시계공원이 나온다. 정동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통일공원에 도착한다. 통일공원에는 1996년 안인진리 해안으로 침투하다가 좌초된 4000톤급 잠수함과 1999년까지 전투함으로 활약하다 퇴역한 전북함 등이 전시돼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인 등명락가사, 다양한 설치미술 작품들이 전시된 하슬라 아트월드 등도 이 해안도로에서 만날 수 있다.

투구 바위와 육발 호랑이 전설
바다를 바라보며 투구를 쓰고 있는 바위의 형상에서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바위의 생김새가 투구를 쓴 장수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 투구 바위라고 부른다.
이 지역에 내려오는 설화 중 고려시대 명장인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육발 호랑이 내기 두기’라는 설화가 있다. 여기서 육발 호랑이는 발가락이 여섯 개인 무서운 호랑이를 뜻한다.

아주 옛날, 육발 호랑이가 밤재를 넘어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사람(스님)으로 변해 열십 자 바둑판을 그려놓고 내기 바둑을 두자고 했다. 내기에서 이긴 호랑이는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당시에는 강릉으로 넘어가는 길이 밤재 밖에 없어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다. 마침 그 당시 고려시대 명장인 강감찬 장군이 강릉에 부임한 상태였다. 마을 주민들이 밤재에 사는 육발 호랑이를 없애달라고 간청하니 강감찬 장군이 내력을 듣고 관리를 불러 ‘밤재에 가면 스님이 있을 테니 그 스님한테 이걸 갖다 주거라’하고 편지를 써 주었다. 그 편지에는 ‘이 편지를 받은 즉시 그 곳에서 떠나거라. 만약 떠나지 않으면 일족을 전멸시킬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육발 호랑이는 편지의 발신인이 강감찬 장군임을 알아보고 백두산으로 도망갔다. 그 이후 육발호랑이가 없어졌고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비장한 바위의 모습이 당시 용맹스런 강감찬 장군의 형상으로 보인다.

참고 : 강원 어초지역 전설 민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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