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 이용임


맑은 날

우산을 들고 가만히 서면 빗방울이 내 영혼의 이마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몰려올 구름이 대지의 그림자가 후둑후둑 귓바퀴에 돋아나는 시간 저물 장미가 사라질 고요가 긴 골목이 되어 나는 문을 열고 열 개의 발가락을 먼저 떠나보낸다 불어난 발소리를 지우려 가지런한 두 손을 보낸다 활짝 열린 어깨뼈와 숲의 혈관을 빛낼 심장을 보낸다 외로운 골반이 절룩이며 따라간다 길게, 깜박이며 속눈썹과 오후가 멀어진다 빛으로 사금파리가 뚝뚝 떨어지는 창문을 열면 여름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비는 음험한 짐승의 아가리 소실하는 풍경의 육체를 만진다 맑은 날 우산을 들고 가만히

 

-「시는 휴일도 없이」이용임 시집
   걷는사람 / 2020년

권태가 오지 않았다면 이런 시는 쓰여지지 않는다. 권태는 슬픔, 그리움, 사랑, 부끄러움, 미움, 기쁨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거나 그런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세해 진다. 거기엔 상상이 들어 설 자리도 없다.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그것들을 차례대로 기술하면서 쌓이는 건축물이 권태의 공간이다. 권태롭다는 생각도 없이 현상을 따라가고 쫓아간다. 아이가 빛을 가지고 놀듯이, 권태는 어떤 대립도 상정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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