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필 건축사

우리 옛말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다. 남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그때 했던 조언처럼 못하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내 주위에 약사였던 삼촌이 간암으로 돌아가셨을 때에도 “약사가 어찌 자기 몸이 그리된 줄도 모르고……”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마 안경사도 그와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안경사라는 직업도 자기가 쓴 안경테를 남들이 어떻게 볼까 의식해 안경테를 고르는 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모든 직업군이 자기가 속한 전문분야와 관련하여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이다.

필자 역시 필자가 사는 집을 보러오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는 깜짝 놀라며 만류를 한다. 집을 방문하는 이의 따가운 시선이 무섭기 때문인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마도 건축사라면 매우 멋있고 아름답고 세련된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올까봐서다. 그럴 때는 내가 어쩌다 건축사가 되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하고 그런 뒷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건설사가 제공한 아파트에서 살까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필자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옹색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은 경제규모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어쩌면 더 큰 보편적인 구조 속에서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는 상황일 뿐이다. 실은 건축사로서의 가장 큰 직업적인 고민은 따로 있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집을 갖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하면서 늘 해주었던 조언의 주제는 행복해지기 위한 집이었다. 아무리 세련되고 아름다운 집을 짓는다고 해도 그것을 위해 많은 희생이 요구되고 정신적인 인내를 감내해야 한다면 그런 집을 짓지 말라고 권유했다. 안방과 부엌 그리고 현관의 위치를 이야기 할 때 그 기준은 늘 편안함과 행복감을 주는 게 어떤 선택인가, 하는 것이 대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그런 조언을 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행복한가, 그 말이다. 건축하는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누군들 그것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냐마는 집을 설계하는 직업인으로서 내 스스로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것이 마치 의무처럼 다가오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최소한 어제는 행복한 하루였다. 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에서는 건축연구집단을 결성하고 한 달에 한번씩 모여서 도내 답사를 다닌다. 어제는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가파도를 다녀왔다. 11명의 건축사가 하루 일과를 접고 가파도에 있는 민가와 현대건축을 돌아보고 후담을 나눴다. 거기에서 오갔던 내용이야 어찌 되었건, 건축한다는 것에 즐겁고 행복함을 느꼈다. 내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건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수많은 의뢰인에게 조언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건축을 하는 동안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까? 소위 집을 구상한다는 전문가들이 스스로에게 그 길을 묻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 아닌가. 필자가 남들에게 했던 조언처럼 나 스스로도 건축을 통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의뢰인에게 빚을 진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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