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당5동주민 ⓒ김재경

성저십리(城低十里)
조선시대 한양성 4대문을 기점으로 약 십리까지의 외곽지역이 이에 해당하는데, ‘한양’이라고 하면 4대문 안을 말하는 것이고, ‘한성부’라 하면 대개 이 지역까지를 모두 포함한 말이었다. 동쪽으로는 동대문에서 마장동 인근 중랑천까지, 서쪽으로는 서대문에서 마포와 망원동까지, 남쪽으로는 남대문에서 용산과 한남동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북대문(숙정문)에서 북한산 인수봉 아래까지를 말하니, 한 30여 년 전의 서울 강북지역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서울.
역사의 시간을 지나 부산, 인천 개항 이후로부터 급변하던 한반도 정치,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서울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의 조짐에 의하면 그 변모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육백년 전 한양 도읍 이후보다 근세기 백 년 동안의 변모가 남긴 모습이 지금의 서울이라면, 최근 추진되는 일련의 재개발을 통해서 남겨질 이 도시의 모습은 600살이 넘었어도 도무지 그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성형된 얼굴이 되고 말 것이다. 역사 유적을 보존하는 일은 중요하다. 거기에 시민의 삶과 그 삶의 양태 또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도 중요함은 그것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근세를 통해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의 와중에 남겨진 도시주거환경은 외국의 부러운 사례와 직접 비교할 수 없는 다름이 있다. 우리의 경우 누추해 보이는 도시주거의 열악함이 당시에 보다 좋은 여건아래 짓지 못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도시 삶의 궤적이 남아있고 삶의 애증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필요에 따라서 고치거나 새로이 할 수 있음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도시의 사회, 경제적 연계망이나 조직을 대규모로 바꾸고자 할 경우에 생기는 여러 가지 일들은 손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다. 이를 단기간에 가능케 한다는 것은 그만큼 희생을 감수해야 함을 역사는 말해준다.

도시는 나름대로 도시민에게 많은 기회와 혜택을 제공한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밀도가 높은 주거환경이 형성된다. 어떤 사람은 제집에 살지만 또 어떤 사람은 제집에 들지 못해서 남의 집에 세를 얻어 살며 자신의 일터와 삶터 사이를 오간다. 대체로 이런 모습이 도시민의 일상이다.

여기 쌀쌀해져가는 날씨 가운데 엉거주춤 모여 앉아 자신의 삶터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짜가 지났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고 분하기만 하다. 그동안 정들어 살았던 이웃들과 뿔뿔이 헤어지고 이제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 모여서 서로의 눈빛만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이 사진은 발표를 전제로 찍은 것은 아니어도 암묵적인 허락을 받았기에 싣는다. 방문한 필자에게 이들은 맺힌 이야기 몇 가닥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함께 수제비와 소주 한두 잔을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서로는 마지막이 될 사진을 찍기로 했고, 그 사진을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이름 모를 신당5동 주민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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