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석’이라는 사무소명을 쓴다. 이름의 끝자 자리석‘席’에 어우러진다는 의미‘諧’를 더한 것이, 오른머리로 사람들과 교감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놀이의 의미’가 연필과의 샅바싸움을 왼머리로 이해하려는 ‘풀이의 발음’으로 들려, 즐겁고 논리적인 건축을 바라는 필자의 성향을 잘 담고 있다 생각이 되어서다. 우리나라 위도의 남북을 오가다 지금은 중앙에 자리한 그간 업무특성의 경험치에 의한 것인지 머릿속 종단면의 아래는 오른쪽이, 위는 왼쪽이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이름을 가지고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횡으로 균형을 잡으려 부단히 애를 써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건축사는 누군가와 관계놀이를 함에, 상량을 바라보는 건축주를 축하하는 시간들과 함께 우뇌의 주름만큼이나 입가의 주름도 잔뜩 패일 것이고, 공감을 수치해석으로 정량화하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그래도 건축사는 건축주의 요구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각오에 왼손가락 키보드놀림을 반복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굳다.
그리고 좌우 가운데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돌을 김이 무럭무럭나는 예술영화처럼 만들 수 있는 피터춤토르의 개인기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할 필자의 머릿속 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김’만 모락모락 날 터이니, 나의 노력에 무언가가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 그러한 고민일 것이다. 아마도 제도의 뒷받침과 동료들의 협력이 좌우의 가치를 팽팽하게 지탱해 줄 수 있는 중심이 아닐까 싶다. 사회는 인간의 심리적 유대관계로 성립되고 집단지성이 가지는 잠정적 가치는 무한하기에, 자생하려는 튜브와 로그등의 젊은 노력의 예는 훌륭한 선배들의 프로듀싱으로 보다 연마될 것이고 백발의 멋은 젊은 스웩들 속에서 보다 우아해질 것이다.
질서를 비판하고 삐딱하게 선 후배들을 선배들이 왼쪽으로 다정하게 끌어주는 동시에 후배들이 오른쪽에서 살갑게 웃으면, 그러한 노력의 고된 주름이 후에 누군가의 든든한 디딤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할 방법은 사회적으로 충분히 익숙치 않은 필자의 머릿속에서 축렬을 헤메고 있지만 그 방향은 분명 시대정신의 궤적선상에 있다고 판단되기에 ‘건축문화발전에 이바지하자’는 건축사법 1조에 건축사 윤리선언서 6조 ‘동료건축사의 수입업무와 지식재산을 존중한다’를 더하고 의역할 보다 가치있는 소통의 창구들이 균형있고 다양하게 자리했으면 하는 투박한 바람이 있다.
불안의 바이러스를 넘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고, 하야트가 주는 위대한 상보다 하이트가 담긴 시원한 잔을 나누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