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벙어리 인형처럼 어느 길가에 버려진다고 하여도 나의
다친 흉터와 나의 공부와 나의 일에 닦이며 얻어내는 힘만큼, 나의 세상이
봄인 것이며 사람들도 봄인것이며 나의 마음도 봄인것이기에 나는 내마음을 언제나
다시 믿는 것처럼 봄에 만나는 당신의 마음도 다시 믿는 세상을 살고, 살아갈 自信 속에서 조금씩사랑에대한自身도구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장영수 시인이 쓴 <봄>이라는 시이다.
80년대 초, 신촌의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시인데 세상이 아무리 뒤집어지고 내가 넘어져도 시간이 흐르면 봄은 올 것이고 또한 모든 고난과 괴로움도 시들어버릴 것이니, 다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고이 간직하고 가꿔야겠다는 의미로 봄마다 입에 달고 산다.
봄이다.
엊그제 산수유 꽃망울이 조금씩 터져나오나 싶었는데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개나리 목련 심지어 벚꽃까지 올라오고 여의도에서는 벚꽃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여의도가 아니라 하동 쌍계사라도 한 달음에 달려가서 화사한 벚꽃 그늘아래 앉아 황홀한 꽃 비를 맞고 싶으나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아, 몇 년 동안 도통 그 자리에 가보질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몇 년 전에 찍어두었던 벚꽃 사진을 앞에 놓고 종이에 옮겨 그리며 나름의 꽃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 속의 벚꽃은 힘차게 뻗어나간 나무 줄기 위에 화사하게 꽃잎을 터뜨리고 있었다. 눈으로만 보아왔던 봄이 내 손을 거쳐 종이위로 하나 하나 피어났다.
“봄이 왔지만, 봄은 아니로다(春來不似春)”
주변에서 이 말을 읊조리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불황, 혹은 그 이전부터 시작된 어려움 속에서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어지고 움츠려 들어 일년 내내 겨울 같은 냉기가 흐르는 요즘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신문이라도 볼라치면 눈으로 들어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엽기적이거나, 지나치게 경박하거나 심지어 잔인하기 그지없어 마음 편하게 쉴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어쩌겠나 겨울을 보내야 봄이 온다는데……
벚나무는 봄을 종이에 옮기는 동안 나에게 “시간이 지나면 봄은 오고, 봄이 오면 얼었던 땅이 녹고, 그 땅 위로 화사한 꽃들이 피어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마치 매일 먹던 밥을 어느 날 오랫동안 천천히 씹었을 때 느껴지는 그 깊고도 구수한 맛을 즐기게 되는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내서 심드렁해지고 일상화되었던 일과 나와의 관계를 건축을 처음 할 때의 느낌으로 돌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에 대한 열정과 애착은 다시 살아날 테고, 일하는 즐거움을 다시 찾으면 생활은 활기를 되찾을 것이고 만 가지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은 우리 곁에 와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