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봉직하고 있는 한라대학교는 제주도가 아니라 재단이 한라그룹인 까닭에 강원도 원주에 있다. 그래서 강원도의 수부인 춘천보다 인구가 더 많은 원주를 시골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색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규모가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 불과하므로 상대적인 편견에서 시골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곳은 비교적 수도권과 가까이 있어 옛 부터 한양사람들이 내려와 살곤 했던 곳이다. 이유는 한양보다 풍치가 좋고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공업화가 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도 이곳은 환경이 좋은 곳으로 손꼽히던 곳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서의 훈장질은 나름대로 많은 강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개인적인 취향으로 끝날 줄 알았던 녹색환경의 혜택은 어느새 녹색경제와 녹색성장의 문제로 탈바꿈하여 인류의 공동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대형건설 지상주의로 성장해 온 우리 건축계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리 달가운 추세만은 아니다.

비근한 예로 자동차를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하다. 일본에서 경차란 배기량 0.66리터 미만의 자동차를 말하는데 현재 일본 자동차들은 경차건 보통차건 휘발유 1리터로 20킬로미터 이상은 갈 수 있게 발전해왔다. 그리고 녹색시대 세계를 휩쓰는 최고의 하이브리드 차는 1리터로 36킬로미터를 갈수 있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경차 비중이 30%를 넘어섰고 이보다 더 앞선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앞서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차 기준이 사배기량 1리터 미만을 이며 경차 비중 역시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현 정부는 얼마 전 녹색경제를 위해 자전거를 거론하고 있는데 사실 자전거보다 시급한 것이 경차개발생산임에도 불구하고 낭만스러운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 건축계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정부는 녹색도시, 녹색건축을 운운 하면서도 재건축을 통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고 신도시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한옥을 거론하며 한옥진흥을 위한 제도적 마련에 열을 올리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연륜이 오십년을 넘어가는 도시의 한옥들은 방화의 위험이 이는 불량노후주거로 판정하여 헐려나가고 있고 그곳은 재개발 지구로 정비되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가 대형 건설업과 설계회사가 주도하고 있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가운데 녹색도시와 건축이 거론되고 있다.

우리들의 생활주변만 보아도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하다. 아직도 근대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한국의 도시는 콘크리트 문화에 깊이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건축재의 철근 콘크리트, 철골구조화가 보편화되면서 건축기술은 세계첨단을 지향하고 있으나 이러한 건축기술은 종국적으로 모든 화학섬유를 내장재로 사용하고 기계적 도시구조를 양산시킴으로서 도시생태문제와 정서적 혼동을 초래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계화된 도시생활환경의 급속한 팽창으로 전통 건축 도시 문화 속에 용해되어 있던 인습적인 건강주거도시문화의 퇴출과 함께 녹색건축도시문화의 혁명이 밀려오고 있다.

21세기 건축도시문화에 대한 기대는 이러한 생활문화의 단절 속에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세기말적인 시대 양상은 녹색시대로의 변화를 통하여 건강 주거문화를 향유하자는 매우 본원적인 질문, 곧 천연소재와 풍수이론으로 우리 삶을 담는 건축 도시 공간을 다룰 수는 없는가 하는 매우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근원을 따지자면 사실 친환경적인 도시와 건축의 문제가 논의되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근대건축이 형성되는 시기부터 서양 사람들 입에서도 줄 창 떠들어 왔던 문제들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게 되면서 현실적인 삶의 문제로 부각시킨 것은 교토 의정서에서 세계 기후협약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가 강조되면서 크게 부각된 때문이기도 하고 ‘지구를 건강하게, 미래를 풍요롭게’라는 슬로우건 아래 자연과 인간, 환경보전과 개발의 양립을 목표로 기본 원칙을 담은 선언문 리오 선언(Rio earth charter)이었다. 바로 이것이 겉으로는 환경친화를 내세우면서도 환경파괴를 일삼아온 건설업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동시에 건축과 도시는 21세기 산업혁명인 녹색산업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페레다임의 변화에 당면한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인가. 물론 저탄소 소비 산업구조를 지닌 국가를 만드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정이지 목표는 아니다. 최종적인 것은 바로 우리 삶 속에 불변하는 공통 관심사인 건강한 삶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건축과 도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담는 용기인 건축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로 중요한 출발선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 들어 새삼스럽게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바우하우스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 교수 뚱딴지 같이 한국건축사 시간에 무슨 서양근대사를 강의하시나......” 하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건축사란 한민족의 건축역사를 다루는 분야 아닌가. 좌우지간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건축이론의 출발이 바우하우스를 기점으로 공업화된 기술과 예술을 종합한 건축 이론으로 태동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늘 새롭게 다가오곤 한다. 그것은 녹색산업과 통합된 21세기 건축이론이 어디에선가 발화되기를 기대하는 시골대학 교수의 소박한 염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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