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지방 자치단체 장으로부터 본인이 살 집을 설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전에 그 지방자치단체에 경관자문위원을 하면서 알고 있던 터라 반갑기도 했지만 막상 설계를 하려고 하니 건축주가 지방 자치단체장(市長)을 두 번씩이나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동안 제2의 생을 꿈꾸던 아프리카 난민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 이외에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한참 고심하였다.

우선 대상 부지와 가족 사항 등을 알기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 했을 때, 규모나 시설 면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검소함을 느꼈다. 건축주 첫 마디가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자개장(화려하거나 비싼 가구는 아닌 듯하다)을 꼭 가져가야 하니 설계에 참고해 달란다. 가족 구성은 어머니와 부부 그리고 아들과 손자가 있다. 이렇게 4대가 살아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손님이 오면 일정기간 묶을 방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책이 약 2만권이나 되어서 침실은 작아도 서재는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다. 부지가 서울에서 차로 두어 시간 남짓 가야하는 곳 이라 현장에 다녀오면 꼬박 하루를 보내야 한다. 서로를 좀 더 알기 위해 현장을 갈 때 마다 가능하면 건축주와 가족을 만나 의견을 나누기를 수차례. 구상을 마무리 할 때 즈음 건축주가 그동안 모아둔 자료를 나에게 내 놓는다. 여기 이집처럼... 부엌은 이런 분위기가 좋을 것 같고요. 방은 이런 분위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조용히 헤어져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기분이 좀 그랬다.

다음날 나는 건축주 측에 전화를 걸어 설계를 고만 두겠다고 전했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아니 왜 별안간 설계를 않겠다고 하냐며 의아해 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그렇지 않아도 내가 내려오기 전에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자료를 내 놓으면 건축사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 까 걱정을 했단다. 그렇지만 작가에게 무언가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은데 말로는 힘드니 이렇게 해서라도 본인들의 의견을 전달하자는 순수한 마음에서 였다며 이해를 구한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상대방 입장에서 보니 이 자료를 모으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투자해 여기 저기 좋은 자료를 찾아 헤맸을까 생각하니 미안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보면 건축주가 자기의 취향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자료를 챙겨주는 것 또한 건축사로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지 모른다. 물론 건축사는 주어진 여건과 환경 그리고 건축주로 부터의 다양한 요구조건을 전문가적인 시각과 수단을 발휘해서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건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특히 주택의 경우 사용자가 정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는 너무도 배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마치 자기 의견만 최고인양 한 적은 없는지. 건축사 자신들만의 세계를 혹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다양한 요구조건에 맞추다 보면 결국은 건축주 맞춤형이 되어야 한다. 건축사 맞춤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 유리 커튼월이 많이 도입된 호화 청사들을 보면 모두가 비슷하다. 한 때는 유리로 뒤 덮은 건물이 아니면 현상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제 그런 건물들이 완공됐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건축은 건축사 혼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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