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물건이 넘쳐나듯, 마찬가지로 거리를 거닐면 건물이 넘쳐난다. 시청도 훌륭하게 지어졌다. 공회당도 있다. 미술관도 생겼다. 경찰서도 크게 만들어졌고 우체국도 번쩍번쩍하다. 공원의 숲도 조금씩 불어나고, 백화점도, 레스토랑도 장식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모처럼 만든 건물이 제각각이어서 도시 전체가 조화롭지 못하다. 건물은 훌륭한데 도시에 도대체 품격이 없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이것은 ‘풍경의 쾌락’이란 책을 쓴 나카무라 요시오(강영조 옮김)가 일본의 도시에 던지는 의문이다.
우리의 도시도 다르지 않다. 아니 급격한 도시화의 와중에서 몸집만 불린 우리의 도시는 일본의 도시보다 훨씬 열악하다. 이러한 우리의 도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의 한 항공사진작가의 말대로, 우리의 도시는 ‘도시계획적으로 잘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고 일상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 있다. 가로의 일정 구간 전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는가 하면, 간판 정비에도 나서고 있다. 안내판, 가로등, 버스 정차대, 벤치, 공중화장실 등의 가로시설물들도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다. 똑 같은 모양의 아파트는 아예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거나 일정 구역 안에서는 건축물의 높이를 제한하여 도시경관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도 표명하고 있다. 무표정한 다리들에도 디자인이 입혀지고 있다. 밤의 도시 경관에도 관심을 돌려 도시의 주요 구조물과 키 큰 건물의 옥상들에 불이 밝혀지고 있다. 도시를 대표하는 소위 랜드 마크 건물을 설계하기 위한 국제공모도 부쩍 늘어나고 있다.
도시의 구성요소들을 세련되고 절제·정돈된 것으로 바꾸어 도시를 아름답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좋은 도시공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도시공간은 다리나 건물, 가로시설물과 같이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를 기능적이고 아름답게 한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도시의 빈 공간(public space)을 중심으로 그러한 구성요소들이 잘 어우러지게 될 때 좋은 도시공간은 만들어진다. 명품에 욕심내기 보다는 명소 만들기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도시 안에 있는 각 급 학교, 각종 청사, 기능이 다른 공원, 다양한 형태의 박물관과 공연장 등 특정 이름을 가진 무수히 많은 기능 공간은 한정된 틀 안에 갇혀 그 값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건축물과 길과 강, 산과 공원은 나름대로의 합리적 목표를 갖는 관리자에 의해 관리되는 독립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도시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들을 서로 관계 지워 갈무리하려는 새로운 발상과 접근이 필요하다. 물리적 소통을 차단하는 담장은 물론 특정 시설에 특정 기능만을 한정하는 규제나 지침은 가장 큰 장애요소이다.
단지 안에 갇혀 있는 주거 공간은 도시와 소통해야 하며 공원 안에 갇혀있는 나무와 휴식 공간은 도시로 걸어 나와 한다. 하천에 갇혀 있는 둔치도 엄연한 일상공간의 일부이며, 미관이라는 이름에 갇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광장도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오피스 빌딩이나 호텔의 로비도 도시공간으로 열릴 수 있으며, 건물과 건물사이, 건물의 전면 또한 도시공간으로 통합될 수 있다. 가로를 차지하고 있는 시설물은 가로의 활동을 위해 비켜 서 있어야한다. 미술관에 공원이 붙고 거기에 도서관이 처마를 이어가듯 함께하게 할 수 있게 해야한다. 궁합이 좋은 건물들이 서로 처마를 맞대면서 도시 광장을 이루게 해야 하며, 막다른 길이나 수변에는 도시의 얼굴이 되는 건물이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건축물과 길과 강, 산과 공원이 어우러지면서 도시마다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모습을 갖추도록 가꾸어 갈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좋은 건축이 좋은 도시와 함께 만들어질 수 있다.
한 장소에 입지하는 활동이 다양하면 할수록, 주변에 대해 열려있으면 있을수록, 주변의 다른 공간과의 유기적 연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공간이 활성화될 가능성은 커진다. 이러한 공간들은 적절하게 비어있어야 그 적응력이 높아진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담을 활동(program)의 설계와 필요한 공간의 물리적 개조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하게 하면 할수록 그 공간의 지속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시에는 의미 있는 장소가 만들어진다. 삶의 공간적 토대로서 안정되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전 과정이 유기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시스템을 디자인 하여야한다. 돋보이는 몇 개의 건물이나 조형물, 예쁘게 다듬어진 시설물을 마련하는 것은 차후의 일이다.
도시에서의 ‘의미 있는 장소’란 거기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감이 있어, 내가 거기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곳, 그 곳에 살다간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지금 이곳의 내 삶이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게 될 사람들과 연결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곳, 빼어나게 아름다운 조형물이나 건축물이 있어, 내가 이곳 사람이라는 것이 언제나 자랑스러운 그런 곳, 그 곳에 나가면 언제든지 이웃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와 서비스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을 말한다. 이런 장소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도시야 말로 삶의 공간적 토대로서 안정성과 지속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경쟁력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