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엽이 한없이 풀어져 오백 년 그대로 고여 있는 뜨락이다.

광풍각(光風閣) 돌담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들풀과 버즘 핀

이끼 등걸을 끼고 옛 시절로 서 있는 고즈넉한 정자,

마치 한꺼번에 쏟아내었던 죽림처사의 시 한 수, 그 시대의

정신 하나라도 풍뎅이 가락으로 절절히 돌 것 같아

발길이 청대숲 바람으로 기웃거린다. 한 낮의 고요가 대나무 끝에

찔린 하늘처럼 푸른 물 뚝뚝 흘리며 정원 구석구석에 돌아간다.

시선이 가 닿는 와가마다 구부러져 흐르는 계류(溪流)마다

지천이 시흥인 찬란한 꽃과 고목나무들.

소쇄원엔 세상의 모든 이들이 찾고 싶은 유적이 있다.

재생하지 않아도 이미 복원돼 있는 서늘한 뜨락이 있고

마실없는 유배라도 청죽 사이로 개울을 건너고 다시 건너오는 옛길이 있다.

종종거리지 않아도 서책 한 권 들고 오롯한 원림,

침계문방(沈溪文房)으로 반가이 들어설 수 있는

 

2

달빛이 소쇄원 돌담 틈새로 스밀 때 모깃풀 타는 냄새가 난다

열매 썩는 냄새도 나고 쓰다 버린 파지 태우는 냄새도 난다

개 짖는 소리가 달빛에 감겨 유독 쓸쓸할 때 청대 숲 깊숙이

들어가 본 자만이 알 수 있다 그 선뜻한 한기 속에 한 터럭도

죽지 않은 오백 년 세월이 달빛바람으로 이끼 낀 정원을

돌고 있음을, 소쇄원은 낮도 밤도 닳아지지 않은 유물로

고스란히 마취돼 있다. 청자 귀퉁이 하나 떨어져나가지 않은

도굴돼지 않은 유배촌, 지나던 객들도 청대 숲에 들면 몸이

빠져나가지 않고 마음도 줄지 않는다 한 시절 다 넉넉하여

세상 일이 시조 가락처럼 휘여휘여 굽은 돌담을 맴돈다.

뜨락이 푸른 달빛에 젖는다. 기운 와가에 돋은 잡초도

제 격에 맞는 사유로 유유히 빛을 내고 고목 가지사이에

박힌 별들도 반디 똥구멍처럼 제 빛을 늘였다 줄였다 가락을 잡는다.

먹빛으로 풀어지다만 어둠 몇 가닥, 달 따라 가던 제월당 담장사이로 바짝 몸을 숨긴다.

소쇄원의 밤은 길 하나 열고 닫는 일이 하냥 달빛에 달려 있다.

 

<시와 해설>

양산보의 호가 소쇄원(瀟灑園)인 것은 ‘맑고 깨끗한 세상’을 고대하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맑은 세상에 대한 염원이 사라지자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글방을 짓고 자연 속에 은둔 한다. 소쇄원의 그 빼어난 풍경 속으로 드나들던 당대의 시인 묵객들과의 문학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소쇄원 정원을 시성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나 또한 그 묵객 중 하나여서 틈만 있으면 그곳으로 몸을 돌린다. 마음이 먼저 무등산을 넘고 광주호를 건너가면 몸은 어느새 오래된 정원에 호젓이 닿아있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정지된 시간이 이끼 낀 돌담 틈새에, 정자의 낡은 마루와 서까래에 켜켜이 쌓여 있다. 광풍각 아래 작은 폭포소리에도 죽림처사들의 시어가 구슬처럼 흘러와 내발을 적신다. 가는 시간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시간이다.

문득 흐드러진 자목련 꽃잎에 적힌 붉은 시어들을 읽는다. 누대의 산수가 변함없는 시흥으로 내 눈을 황홀하게 한다.

고즈넉한 정자와 뜨락! 제월당 마루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으며 한평생 산 것처럼 즐거운 유배를 즐긴다.

유배는 밤이 깊을수록 더욱 절절하리라. 그 절절함을 맛보려고 늦은 밤, 달빛이 내는 길을 따라간다. 달빛 먹은 물소리가 옛 문인들의 글 읽는 소리처럼 처연하다. 그 가락을 흉내 내며 물소리로 걷는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 속으로 나는 하염없이 빠져든다.

 

*소쇄원(瀟灑園): 조선조 중종 때의 선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처사로서 은둔생활 을 하며 이룬 한국의 대표적인 원림이다.

*광풍각(光風閣): 소쇄원을 조영한 양산보가 평소 독서하며 기거했던 곳을 말한다.

*침계문방(沈溪文房): 양산보가 독서하며 기거했던 그 당신의 글방을 이른 말이다. 침계는 건물이 시냇가에 위치하여 마치 시내를 베고 있는 듯한 모양임을 이르고, 문방 은 글방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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