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도 자연은 든든한 배후가 되고, 인간이 깃들어 사는 마을과 도시는 그 자체로써 사상의 거처가 된다. 또한 거기에는 도시의 심장을 뛰게하는 강줄기가 사람들을 향해 흐른다. 얼마 전에 런던의 테임즈강가를 밤이 이슥하도록 산책을 하다가 왜 그 이국땅에서 불현듯, 몇 년 전 평양의 보통강변을 거닐던 기억이 떠올랐을까? 너무나 이질적인 연상작용은 두 강과 도시경관이 지니는 생태적 환경의 강렬한 대비에서 온 것이다.
런던의 테임즈강에 있는 워털루, 런던, 타워브릿지 등 다리위에서의 구간별 감상은 물론, 강과 인간문명의 관계를 읽어 낼 수 있다. 각 브릿지에서 조망하는 세인트 폴 성당과 탄두모양의 거킨빌딩, 헬맷모양의 런던시청사, 큰 바퀴를 공중에 매단 것 같은 런던아이, 영국국회의사당의 빅벤이라 불리우는 시계탑, 21세기를 맞아 건축한 밀레니엄 돔 등은 시공간을 조화롭게 조합해내고 있다. 영국의 테임즈강변은 요즈음 21세기를 건축적으로 재구축하고 있다. 새로운 대영제국의 회복을 이 강변에서 과시하고 있다.
파리의 세느강은 여기에 비해 강폭이 좁아서 디테일과 컨텐츠가 풍부한 문화적 상징으로 다가온다. 연인들의 약속의 다리인 퐁네프다리, 사랑의 시가 흐르는 미라보다리에는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이 장식되어 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로 시작하는 아폴리네르 시 한자락 읊어대던 청춘시절을 생각하면 분명 시적, 문화적 이미지로 다가오기는 한다. 로틀담사원, 에펠탑, 오르세미술관 이외에도 낮고 고풍스런 석조건물들에서 오는 강렬함과 차분한 거리 풍경에서 안정감을 읽어낸다. 세느강은 그 화폭위에다 21세기의 예술적 켄텐츠를 입혀서 국력을 세일 중이다.
한강도 서울이 오늘날처럼 거대도시화 되기 이전에는 생태계가 온전하고 시민들의 삶속에서 부대끼며 일상과 유기적 일부였다. 그러나 한강은 도시팽창으로 인해 자동차가 점령한 도로와 강을 포위한 고층아파트가 삼켜버린 형국이다. 강과 사람이 자동차도로로 의해 단절되고 상하수도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강북과 강남은 문화적, 경제적 이질감을 부축이며 경계의 상징이 되었다. 강북은 역사와 정신이 깃든 허리상학적(형이상학적) 공간이고, 강남은 물질과 욕망이 점철된 허리하학적(형이하학적) 공간이 되어버렸다. 서울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제각기 따로 살아가는 또다른 형태로 소통 부재의 분단이다.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회복하여야하는지를 되물어 볼 때이다.
처음에 대동강변에서 보았던 평양이라는 도시의 모습은 건물이 이고 달고 있는 슬로건이 프로파간다로 다가왔다. 그 다음에는 건물들이 자기 정체성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인민대학습당, 옥류관, 국립미술관, 만수대의사당, 능라도의 경기장 그리고 김일성광장을 강건너에서 받아내고 있는 주체탑까지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관은 펼쳐진 경관과 촛점 경관으로 다가온다.
지나간 미래는 강유역을 배고 길게 누워있다. 요염한 곡선의 라인을 그리며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과 보통강은 치렁치렁 시간을 두르고 인간들을 끼고 살아내고 있었다. 대동강도 평양의 젖줄이며 동평양과 서평양을 어깨동무한 형국을 읽을 수 있다.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시가지 중심을 동서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능라교, 옥류교, 대동교, 양각교, 충성의 다리 등 10여개의 다리가 평양시를 동서로 연결하고 있다. 대동강 상에는 능라도, 양각도, 두루도, 이암도, 반월도 등이 있다.
강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내면성을 축적한다. 이는 그 사회의 현재와 미래가치에 대한 인식의 가늠자이자 그 도시의 지속가능성의 잣대 인 것이다. 한강은 르네상스 프로젝트라 이름 붙여진 계획으로 한강을 시민들의 품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여러 시도가 진행 중이다. 북한은 2012년까지 이른바 강성대국을 위해 대동강유역에 여러 건축프로젝트와 시설들을 계획 중이라고 알려진다. 부디 대동강유역의 새로운 도시경관을 제시하기 전에 생태적 미래가치를 함께 고려하여 디자인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