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승
심문
- 이현승
늙는다는 것.
때리는 것도 힘에 부치지만
사실 맷집도 달린다.
권고사직을 제안 받고 그는
소진된 복서처럼 무엇이든
그러안고 싶었다.
피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
세월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빼앗아 버린다.
내버리다시피 판 주식을 사서
대박 난 사람처럼
불행은 감당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를 비집고
재앙은 불평등에 그 본성이 있다.
누군가 지금 그에게
가벼운 안부라도 묻는다면
바늘로 된 비를 맞듯 그는
땅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 쓴 얼굴로.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시집 중에서/창비/ 2015
한 번 다운되어 본 적이 있는 복서는 경기가 잘 안 풀리고 힘이 들 때마다 종종 링 바닥에 눕고 싶어 한다. 빨리 그 편안함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 패배도 습관이다. 너무 버거운 상처를 가진 사람은 가벼운 안부에도 쿡, 하고 울음을 쏟는다. 그 말이 따뜻해서가 아니라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풍선처럼 이미 터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누구든 그만 링 바닥에 눕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한 마디는 남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나온다.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 쓴 얼굴로.”
함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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