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단순히 예술이며 공학이 아니다.
건축은 이제 인문적 사실, 곧 근원의 가치를 기술로 번역하는 '큰 기술'인 것이다."

요즈음 올해 말을 목표로 하여 저서를 쓰고 있다. 이제까지 내가 생각하는 건축과 학생들이 함께 알아야 할 내용을 고르게 넣은 교과서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건축에 대한 정의였다. 무엇의 정의라고 하면 실무와는 무관한 딱딱한 이야기려니 하고 지나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건축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고상한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다시 묻는다. 건축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건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물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건축은 미적인, 예술적인 정신을 함양한 것이고, 건물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구별이다. 건축은 고상하지만 건물은 그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건축인 ‘architecture’는 정신세계를 담은 것이지만, 건물인 ‘building’은 혼을 잃은 것이고, 그저 물리적인 부재의 조합이다. “건축 빼기 정신”이 “건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너무나 우리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건축에 대한 자격 매김은 오래 전부터 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정의의 효시는 ‘유럽건축사 서설’의 첫 마디를 이렇게 시작한 니콜라우스 페브스너(Nikolaus Pevsner)라는 건축사가일 것이다. 그런데 “건축 빼기 정신”이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페브스너의 긴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건축을 ‘architecture’로 부르던 다른 것으로 부르던지, 건축은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자연 속에서 내가 살 곳을 구별하고, 땅과 구별하기 위하여 기단을 놓은 후에 구조물을 올려놓기도 하였다. 외부 공간과 구분되는 내부를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내 마을과 다른 마을을 구분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야 했다. 지금도 건물은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밀실한 구법으로 창을 만들고, 밖에서는 비 한 방울, 바람 한 점도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막기에 열심이다. 지하층은 수맥을 끊고, 단열재로 열을 차단하는 것은 기본이다. 집은 자연을 역행하고, 도시와 단절되어도 별로 감각이 없고 무관심하다. 건축의 공공성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뿐만 아니라. 유명한 건축사는 자기의 건축이 다른 이들의 건축과 구별되는 바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이를 각종 매체에 선전한다. 그렇게 선전된 내용은 철학으로, 미학으로, 정신으로 승화한다.

학교에 들어오면 건축설계를 시작하자마자 이른바 ‘콘셉트’를 강조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1학년 학생에게 제일 먼저 나만의 ‘콘셉트’를 요구한다. 그것도 나 자신이 창의적으로 발견한 바를 건축설계에 어떻게 반영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한다. 나만의 ‘콘셉트’. 이것이 건축설계교육의 시작이요 끝이다. 물론 이런 연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건축설계는 무언가 계속 구별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건축설계를 열심히 애야 하는 자는 그 ‘구별’에 열심이어야 하는가?

건축과 관련된 업역에서도 구분이 아주 심하다. 설계만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여러 분야가 너무 한 쪽에서만 바라본다. 공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는데도, 모두 공을 던지려고만 한다. 세칭 요새 유행처럼 생각하는 어떤 분야가 모두 자기 전공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건축은 “건물 더하기 정신”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일을 앞에 두고는 이러한 정의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건축은 참으로 여러 방면에서 ‘구별’하는 곳에서 성립하는 것 같다. 건축이라는 말의 성립과 교육과 건축사의 작업과 전문 업역 등에서, 건축은 이기적인 산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건축이, ‘architecture’가 이기적인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건축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구별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행위에 가려 있을 뿐이다. ‘architecture’는 본래 ‘architecton’의 ‘techne’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근원을 아는 공장(工匠)의 기술”이라는 뜻이다. 건축은 “건물 더하기 정신”이 아니다. 건축은 “근원을 아는 자의 기술”이며, 건축사는 “근원을 알고 이를 기술로 바꿀 줄 아는 자”를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건축은 “근원을 아는 자의 기술”인가? 여기에서 ‘근원’이란 변하지 않는 것, 또는 변하기 어려운 것, 불변의 가치, 불변의 원칙과 같은 것이다. 다른 기술은 한 가지의 목적만을 바라보는 데 반하여, 건축은 잘 바뀌지 않는 것, 또는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을 이해하고 제시하며 이것을 유지해야 함을 인식하고, 이를 기술로 번안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간적인 사실, 공동체가 지녀야 할 사실, 계속 지속해야 할 환경의 가치, 역사적이며 기억 속에 잠재하는 사회의 가치, 땅이 가져야 할 변할 수 없는 가치, 사람이라면 응당 갖게 될 수밖에 없는 무언가의 가치, 중력이나 토질, 바람, 물의 흐름과 관계하는 불변의 원칙, 각 사회의 계층이 공간을 통해서 언제나 바라는 바를 기술로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과 건물을 구별할 필요도 없고 구별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불변의 조건을 기술로 바꾸어 만든 결과가 건물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건축은 건물로 존재한다.

건축은 “근원을 아는 자의 기술”이란 건축은 기술을 무언가의 불변의 가치를 위해 통합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건축은 부분적인 기술, 지엽적인 기술, 요소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기술이 통합된 “큰 기술”이다. 최근 조소적인 말투로 건축을 아주 작은 것, 말단의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21세기는 과거의 시장경제, 산업화 시대를 넘고, 정보화 시대를 거쳐, 시간을 중시하는 지속성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이 지속형의 사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환경을 쉽게 바꾸지 않는 사회, 성장을 위해 쉽게 불변의 가치를 내놓고자 하지 않으려는 사회, 기술을 낱개로 보지 않고 서로 엮인 것으로 보고자 하는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가치를 향해 모든 것을 수렴하고자 하는 사회를 말함이 아닌가? 건축이 도시와 잘 구별되지 않고, 조경과 건축이 구별되지 않으며, 기술과 건축이 통합하여 나타나고, 인간의 생활을 그대로 표현해 내고, 지역사회에 충실한 건축이 요구되는 현상이 이미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건축은 20세기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이제까지 가볍게 보았던, “근원을 아는 자의 기술”인 건축에 대하여 많은 것이 수렴되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이때 사회를 잘 보고 기술을 잘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어느 때보다고 인문학적 사실과 가치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런 이미에서 건축은 단순히 예술이며 공학이 아니다. 건축은 이제 인문적 사실, 곧 근원의 가치를 기술로 번역하는 “큰 기술”이다.

국가건축정책이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입장에서다. 이러한 입장에 설 때, 건축이 살고, 그것을 통해 사회가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건축기본법의 근본적인 취지이고, 또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국가건축정책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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