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에 있는 상당산성에 올랐다. 경인년의 붉은 해맞이를 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1월을 훌쩍 넘어 2월의 중반으로 치닫는다. 바쁘게 살아온 나날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직 녹지 않은 산등선의 흰 눈과 함께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을 본다. 매일 뜨는 태양이지만 새해 첫날 보았던 붉은 태양과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지역 건축 문화 발전과 회원 권리 증진 및 사회봉사 등의 내용으로 청주지역 건축사 회장 활동을 한지 벌써 2년이라는 기간이 지났다. 초심으로 그것들을 이루며 살고자 했다. 지금의 마음은 초심의 열정과 함께 2년이라는 세월이 색칠되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2007년 5월에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찾아갔던 곳은 보육원이었다. 경제위기 이후 들어온 아이들이 많은 곳이었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세상의 풍파 속에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만 4,5세가 생활하고 있는 새싹 반에 들어갔을 때 8명의 아이들이 문 앞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반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앉아 웃고 있는 내 등과 무릎 위로 아이들이 올라왔다. 집에 있는 아들 녀석이 그랬다면 씨름을 한 판하며 힘 대결을 하고 웃었을 텐데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내 몸을 맡긴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봉사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나는 그것이 특별난 다른 일로 느껴졌던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 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특별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우물쭈물 앉아 있는 나에게 8명의 아이들이 올라타는 바람에 나는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쓰러지는 순간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대로 누워 그 아이들과 뒹굴고 배 위에 태우고 놀았다. 그 순간은 ‘어떻게 해야 하지?’ 가 아닌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그 녀석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무엇이 아닌 있는 그대로였다. 가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근원적인 나눔이 느껴졌다. 가족봉사가 우리가족 모두를 행복하게 한 하루였다.
그 날 이후 봉사로써 나눔이 내 인생에 작은 전환점이 되었고 그로인해 충북 청주지역건축사회 사랑나눔동우회를 통해 매달 봉사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보육원과 양로원등 사회복지시설로 정기적인 봉사를 갔다. 거동을 할 수없는 노인들을 옮기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부모님에게 받으려고만 했던 생각이 바뀌기 시작 했고 사랑의 김치 담그기와 사랑의 연탄 배달 봉사활동은 함께 나누는 땀방울의 의미를 알게 했다. 건축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작한 나눔 봉사 이었다. 지역 건축사회에서 하는 나눔의 출발이지만 이것이 건축사로써 시작하는 작은 실천이 아닌가 싶다.
법정스님의 참 좋은 이야기 글 중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도 어려운데 어떻게 나누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려움을 넘어서 나의 고통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남에게 우리가 무엇인가를 베푼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느끼는 그 행복은 도저히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기쁨이다.
지금 우리 건축사들은 여러 가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를 이기려면 정연한 논리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건축사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국민들이 건축사의 편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라도 조직적인 봉사가 필요하다. 이것이 건축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인 것 이다.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삶의 법칙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근본원리이다. 나누는 삶이 더 큰 행복이며, 나누는 삶이 수백 배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준 다는 것은 봉사 활동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다.
“자! 이제부터는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말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건축사의 따뜻한 마음을 새로운 방법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진정한 나눔의 기쁨을 통해 하나 되기가 건축사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가장 소중한 방법 이라 생각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