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수익 얻지 못하는 독일 부동산 제도,
세입자의 주거안정, 공간에 시간·비용 투자로 이어져
대한건축사신문은 해외 실무경험이 있는 건축사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 제도나 정책의 한계점, 개선 방향 등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독일은 다양한 형태와 기간의 연휴가 있고, 근로 방식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프로젝트를 장기간 유연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팀 운영 시스템 구축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편입니다. 더불어, 건축사 주변에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 전문가 그룹이 존재합니다. 건축사는 특정 기술 분야의 전문 엔지니어라기보다는 건축물이 지어지는 전 과정에서 조형적·공간적 질을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축사와 함께 협업할 수 있는 다양한 전문 엔지니어 그룹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건축 산업 내에 다양한 건축엔지니어 군(群)의 건강한 생태계 조성이 건축 품질을 높이고 건축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건축 설계를 작업 중인 이광진 독일건축사(K LEE ARCHITEKT / Max Dudler GmbH)는 구체적인 팀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 장기 프로젝트를 끌고가는 독일 설계사무소의 사례와 높은 품질의 건축물을 유지하기 위한 독일 사회의 노력 등을 소개했다.
Q1. 어떤 나라에서 실무를 진행했고, 당시 어떤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건축을 배우면서 싱가포르, 일본, 한국, 독일에서 인턴을 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습니다. 학사 졸업 후에는 한국에서 실무를 했고, 독일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베를린에 위치한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현재까지 10여년 정도 건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프리랜서 건축사로 개인 작업도 병행 중입니다.
독일 실무에서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독일 건축학과 학생들이 대부분 장기간 인턴 과정을 거친다는 점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최소 6개월에서 최대 3~4년까지 회사와 인턴 자격으로 근로계약을 맺고 학업과 실무를 병행합니다. 장기 인턴십을 통해 학생들은 설계 사무소의 건축 철학과 프로젝트를 깊이 이해합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정식으로 건축사를 채용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안정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고, 인턴 입장에서는 단순한 업무에 그치지 않고 심화된 설계 과정까지 긴 호흡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독일에서는 실무 경험을 졸업 이후의 새로운 단계로 보기보다, 학생 시절부터 이어온 경험의 연장선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졸업 이후에도 자연스럽고 안정적으로 실무에 적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Q2.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국내와 가장 다르다고 느낀 설계 환경이나 일하는 방식이 있었다면 어떤 점이었나요?
독일에서는 프로젝트 팀을 구성할 때, 팀장과 부팀장을 항상 함께 구성합니다. 유럽 타 국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독일은 연중 다양한 형태와 기간의 연휴가 있고, 근로 방식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풀타임으로 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프타임으로 오전에만 회사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달 뒤에 배우자의 출산으로 일 년 간 육아휴직을 쓰는 경우도 있고, 일 년의 반은 베를린 회사로 출근해 일하고, 나머지 반은 재택근무로 포르투갈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장기 프로젝트를 유연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항상 복수의 팀 운영진을 구성해 진행합니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프로젝트를 일임하기 보다, 팀 운영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Q3.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제도나 정책 중 현장에서 불편하거나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독일에서 실무를 하며 느낀 건, 건축사 주변에 정말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 전문가 그룹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건축사는 특정 기술 분야의 전문 엔지니어라기보다는, 건축물이 지어지는 전 과정에서 조형적·공간적 질을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축사와 함께 협업할 수 있는 다양한 전문 엔지니어 그룹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독일에서는 엔지니어 전문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정책적 지원이 잘 마련돼 있고, 사회적으로도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습니다. 뛰어난 건축사가 한 명이 있다면 멋진 건축물 하나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건축 엔지니어 군(群)의 건강한 생태계가 조성된다면, 더 높은 품질로 건축물이 완성돼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Q4. 건축사의 역할이나 사회적 위상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삶의 공간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는 만큼 독일 사회에서 건축사는 존중받는 직업입니다. 요즘도 독일에서는 상량식(Richtfest)과 같은 전통 행사를 치룹니다. 특히 공공 프로젝트의 경우, 시민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일상적으로 이뤄집니다. 이러한 건축문화를 보면서, 시민들이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에 건축사의 생각과 판단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독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집은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부동산을 통해 단기간에 큰 수익을 얻는 구조가 아닙니다. 세입자도 오랫동안 한 집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집을 단순한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구입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공간을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합니다. 이 같은 문화적 배경에서 건축사는 일상에서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며, 전문성과 판단을 신뢰받고 있습니다.
Q5. 해외에서의 경험이 건축사로서의 생각이나 방향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설계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면?
독일에서 건축사로 지내며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제 일상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건축·도시 공간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의 학부 시절 동안 저는 한국의 건축과 도시공간 속에서 많은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반면, 책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접했던 유럽의 건축과 도시는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공간을 ‘몸으로’ 느낄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생활하며 건축사로 일하는 지금, 저는 일상 속에서 그 한계를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티어가르텐 숲을 거닐다가 쉰켈의 나무들을 직접 마주할 때,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신국립미술관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세련된 이유를 일상의 공간 속에서 직접 체감할 때, 도시 속 건축공간이 지니는 의미를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제게 ‘좋은 건축’이란 단지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사람의 일상 속에서 스며드는 공간의 질이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