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좋은 공간 위해 건축사 필요하다는 사회 인식
연차 아닌 역량에 따라 프로젝트 수행

대한건축사신문은 해외 실무경험이 있는 건축사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 제도나 정책의 한계점, 개선 방향 등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이두형 덴마크 건축사(시아플랜 건축사사무소)

제가 본 덴마크 사람들은 평소에도 좋아하는 건축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습니다. 미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그 장소에서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건축 비평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그것이 디자인과 건축에 관심이 많은 덴마크 사회의 분위기 같기도 합니다. 좋은 공간, 건축물을 위해서는 건축사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그에 합당한 보수 체계도 덴마크 사회에서 건축사의 위상을 높이는 요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덴마크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이두형 덴마크 건축사(시아플랜 건축사사무소)는 건축과 디자인을 보는 덴마크 사회 분위기와 건축사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언급했다.  

Q1. 어떤 나라에서 실무를 진행했고, 당시 어떤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덴마크에서 석사 과정 2년을 포함해 약 9년간 코펜하겐 소재의 건축사사무소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실무 경력을 쌓았습니다. 두 회사 모두 크지 않은 스튜디오 형식의 회사였지만,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이나 규모가 매우 달랐습니다. 첫 번째 회사는 주거단지, 마스터플랜 위주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곳이었고, 두 번째 회사는 고급 주택, 하이엔드 상업 인테리어 디자인 등을 수행하는 곳이었습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제가 진행했던 첫 프로젝트는 런던 소재의 스파와 수영장을 포함한 웰니스센터 디자인이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수백 세대가 넘는 주거단지를 계획하다가 갑자기 사우나 공간을 디자인하던 제가 너무 낯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 분야에 대한 역량이 있다면 개인의 배경을 떠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적극 채용하는 덴마크의 사회적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Q2.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국내와 가장 다르다고 느낀 설계 환경이나 일하는 방식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모든 건축사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사사무소마다 일하는 방식이나 구성이 다르겠지만, 덴마크의 많은 회사들이 임원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키텍트라는 타이틀로 활동합니다. 연차에 따른 직급이 아닌, 본인의 특별한 역량에 따라 타이틀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프로젝트의 규모 또는 방식에 따라 팀 또는 단독으로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연차나 직급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건축사가 특정 위치에서 프로젝트를 이끌기도 하고,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역할이 바뀌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제가 일하던 스튜디오에서는 10년 차 경력자와 3년 차 경력자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큰 역할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경력이 아닌 프로젝트에 필요한 스킬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고, 개개인이 건축사로서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 덕분에 모든 구성원이 본인의 장점과 역량을 존중받으며 일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오르후스 건축학교(Aarhus School of Architecture) 졸업작품으로 제안된 이 계획안은 건축 드로잉을 위한 아카이브 건물. 코펜하겐 아카이브에 소장된 건축 드로잉이 디지털화(스캔)된 이후 폐기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과거 건축가들이 손으로 그린 드로잉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제안된 프로젝트다. (설계·사진=이두형 덴마크 건축사)
​오르후스 건축학교(Aarhus School of Architecture) 졸업작품으로 제안된 이 계획안은 건축 드로잉을 위한 아카이브 건물. 코펜하겐 아카이브에 소장된 건축 드로잉이 디지털화(스캔)된 이후 폐기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과거 건축가들이 손으로 그린 드로잉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제안된 프로젝트다. (설계·사진=이두형 덴마크 건축사)
오르후스 건축학교(Aarhus School of Architecture) 졸업작품으로 제안된 이 계획안은 건축 드로잉을 위한 아카이브 건물. 코펜하겐 아카이브에 소장된 건축 드로잉이 디지털화(스캔)된 이후 폐기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과거 건축가들이 손으로 그린 드로잉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제안된 프로젝트다. (설계·사진=이두형 덴마크 건축사)
오르후스 건축학교(Aarhus School of Architecture) 졸업작품으로 제안된 이 계획안은 건축 드로잉을 위한 아카이브 건물. 코펜하겐 아카이브에 소장된 건축 드로잉이 디지털화(스캔)된 이후 폐기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과거 건축가들이 손으로 그린 드로잉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제안된 프로젝트다. (설계·사진=이두형 덴마크 건축사)

Q3.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제도나 정책 중 현장에서 불편하거나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국과 덴마크의 건축 문화와 제도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두 나라가 물리적 환경, 기후, 인구 밀도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덴마크와 한국에서 건축 실무를 하면서 느낀 차이점은 건축 법규 및 인허가 절차의 단순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비교해 덴마크가 제도적 절차의 많은 부분에서 간소하고 합리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덴마크 건축 규정을 보면, 구성과 세부사항 등이 명료해서 덴마크 법규 구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외국인도 큰 문제없이 기본적인 건축 법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예외사항이나 의문점은 회사 내 인허가 절차를 담당하는 건축사와 담당 공무원의 회의를 통해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프로젝트마다 절차와 결과물이 다르지만, 제가 담당했던 코펜하겐 중심가의 아파트 증축 프로젝트의 경우, 설계 변경 및 인허가를 위한 회의에서 건축사가 준비해야 하는 자료는 기본적인 건축도면과 해당 건축물의 도시 규제 준수사항 정도로 간단했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이 정도 자료로 협의가 가능한지를 재차 물은 기억이 있습니다.  


Q4. 건축사의 역할이나 사회적 위상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덴마크는 사회 전반적으로 디자인과 건축에 관심이 높습니다. 그것이 건축과 건축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특히 덴마크는 가구, 조명, 공간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브랜드 평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건축사가 공간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현재에도, 제가 다녔던 회사를 포함하여 많은 건축사들이 적극적으로 공간에 더해질 가구, 제품, 조명 디자인 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축사의 폭 넓은 활동으로 인해 덴마크에서는 건축사의 사회적 위상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덴마크에는 국가 공인 건축사 제도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과 달리 건축사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합격해야 하는 시험 제도가 없습니다. 다만, 사회 통념적으로 건축 마스터 과정을 졸업한 사람에 한하여 건축사(Arkitekt)라고 불립니다. 물론, 덴마크 건축사협회 회원에게는 별도의 타이틀(Arkitekt MAA)이 주어집니다. 자격 제도가 없음에도 좋은 공간과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축 디자인이나 설계를 전공한 건축사가 맡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건축사의 사회적 위상이 높은 이유는 건축사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5. 해외에서의 경험이 건축사로서의 생각이나 방향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설계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면?  

덴마크 건축이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축사사무소가 많은 이유는 시민들의 건축에 대한 높은 관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덴마크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자리에서 자주 등장했던 대화 주제는 좋아하는 건축물과 공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미적인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이 아닌, 그 장소에서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건축 비평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건축 비평이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면 건축사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에 좋아하는 공간과 건축물이 있고, 더 나아가 좋아하는 건축사의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시민들은 건축사에게 좋은 건축을 제안하도록 요구합니다.  

해외건축사 자격을 인증 받아 현재 한국에서 실무를 이어가고 있는 저는 건축사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축 관련 제도의 개선을 통해 건축사가 좋은 건물을 계획 및 구축하는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건축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인식의 변화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건축을 부동산 수익을 위한 수단이 아닌, 더 나은 삶과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인식한다면, 건축사 역시 과도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제안이 아닌, 도시와 사람을 위한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건축적 관심과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이 변화는 더욱 가속될 것이고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저 역시도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하며, 기억에 남는 공간 제안을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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