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변경 권한 ‘건축사’만 갖는 프랑스
사회적 위상 높아, 건축 외 분야 진출 활발
대한건축사신문은 해외 실무경험이 있는 건축사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 제도나 정책의 한계점, 개선 방향 등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신진 건축사에게는 실패해도 괜찮은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젊은 건축사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제안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이런 기회가 신진 건축사를 성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 모두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프랑스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백희성 건축사(킵·KEAB 건축사사무소, 프랑스 건축사)는 신진 건축사를 대하는 프랑스식 관점을 언급했다. 어떤 제안이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토론 분위기와 신진 건축사의 좋은 제안을 경험 많은 건축사들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문화를 소개했다.
Q1. 어떤 나라에서 실무를 진행했고, 당시 어떤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프랑스에서 건축학교 석사과정을 마친 뒤 프랑스 공인건축사로서 파리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습니다. 프랑스도 건축사사무소마다 업무 방식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신입 건축사에게 약 3개월간 ‘기회의 시간’을 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수습기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신입 건축사가 회사에 적응하기 전에 오히려 신입 건축사를 통해 회사가 새로운 자극을 얻으려 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제 팀장이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다양한 제안과 새로운 시선으로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토론해달라는 당부였습니다. 회사가 저를 채용한 이유가 바로 그 자극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Q2.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국내와 가장 다르다고 느낀 설계 환경이나 일하는 방식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모든 구성원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대표 건축사와의 토론 자리는 사전에 준비되지 않고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보통 논의거리를 준비하고, 제안한 뒤 방향을 만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조차 자유롭게 오가는 독특한 프랑스식 토론 문화의 덕분 같았습니다. 이 토론 자리에서는 누군가 제시한 의견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신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개념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적합하지 않다’는 식의 단정적인 발언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신입부터 베테랑까지 위축되지 않고, 눈치 보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진 건축사가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을 한다면 시니어 건축사들은 “구현이 된다면 정말 훌륭할 것이다. 제 경험으로는 몇 가지 문제점이 예상되지만, 그 부분은 함께 풀어보자”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부정하는 대신, 좋은 제안이라면 경험 많은 건축사들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문화였습니다. 이것이 창의적인 논의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봅니다.
Q3.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제도나 정책 중 현장에서 불편하거나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프랑스에서는 건축사의 설계안이 한 번 확정되면 쉽게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의뢰인이 중간에 마음을 바꿔도, 이미 허가를 받은 설계안을 변경할 권한은 건축사에게 있습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인식입니다. 물론 설계 변경의 용이한 허용과 그렇지 않은 복잡한 제도 사이에는 늘 논쟁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건축사의 설계안을 존중하고 끝까지 지켜주는 제도가 있기에 건축 역사에 남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계변경 권한이 ‘건축사’에게 있는 것이 유럽의 전반적인 인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독일 건축사 마인하르트 폰 게르칸(GMP)의 베를린 중앙역 프로젝트가 유명한 예시입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발주처가 역사의 지하 일부의 설계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완공 시한이 촉박하다는 이유였습니다. 폰 게르칸이 이를 거절했음에도 발주처가 임의로 설계를 변경했고, 월드컵 개막에 맞춰 역사가 완공됐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 법원은 건축사의 원 설계안을 지지하며, 발주처에 막대한 위약금과 함께 원안대로의 재시공을 명령한 바 있습니다.
Q4. 건축사의 역할이나 사회적 위상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건축사의 사회적 위상은 매우 높습니다. 건축사라고 저를 소개하면, 프랑스인들은 흥미를 보이며 존중을 표했습니다. 그런 만큼 건축사의 역할도 설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건축 이외의 분야로 진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건축사가 그림을 그리고, 책을 집필하고, 강연을 하는 일은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건축사의 활동으로 여겼습니다. 건축사의 다양한 활동이 건축사에게 더 넓은 시야와 창의적 활동의 기회를 열어준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건축사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건축이 입체적이고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한다고 봅니다.
Q5. 해외에서의 경험이 건축사로서의 생각이나 방향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설계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면?
신진 건축사에게는 실패해도 괜찮은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경험이 부족하면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결과를 담보로 한 기회가 아니라, 실수를 통해 편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합니다. 실무 경험이 쌓일수록 건축사의 역량은 성장합니다. 하지만 경험은 대체로 한쪽 방향으로 깊어집니다. 흐름을 전환시키는 힘은 다른 시각으로,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젊은 건축사들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 건축사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제안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진 건축사의 성장뿐만 아니라 팀 전체,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변화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저희 사무소에서는 젊은 건축사의 제안에 결코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더 듣고, 더 고민하며, 그 제안 속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