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선 건축사(사진=디자인플러스 건축사사무소)
전희선 건축사(사진=디자인플러스 건축사사무소)

지난해, 강릉에 분양을 앞둔 대형 건설사 브랜드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찾았다. 구경하려는 인파가 꽤 많아 긴 줄을 서야 했고, 기다리는 동안 분양 팸플릿을 훑어봤다. 문득, 10여 년 전 재개발 아파트를 설계하던 대형 사무소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쩐지 단위세대 평면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발코니 구조변경 합법화’ 이후, 소위 ‘서비스 면적’을 단 0.33제곱미터(0.1평)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치르던 그때, 건축사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현재 전국 대부분 아파트 평면은 소위 원형을 정립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실망한 마음을 안고 들어선 모델하우스의 내부는 내 섣부른 선입견에 반격을 날리는 듯했다. 반전이었다. 감각적인 실내 디자인, 창호 사양, 기후에 대응한 친환경 설비 관련 하드웨어, 사용자의 편의성을 적극 반영한 여러 전자 시스템, 조명과 주방의 구성, 수납 등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간도 매우 효율적이었다. 적정하게 따스한 조명과 현관 진입부터 그리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 ㄷ자로 구성된 넉넉한 주방의 작업대, 온 가족들과 오순도순 요리하며, 동시에 거실의 손님과 마주하는 풍경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침실은 또 어떠한가. 마스터 배드룸의 전용 욕실과 드레스룸의 구성이 훌륭하다. 전용면적은 76제곱미터인데, 침실이 3개나 된다. 딱 좋다. 나조차도 구매 욕구가 치솟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모델하우스를 나서며,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여러 생각이 겹쳤다. 매번 프로젝트마다 영혼을 갈아 넣고, 밤을 새우고, 각종 보약까지 동원해 가며 만들어 내는 작업이, ‘자이’의 그것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애씀과 고민이 잘 만들어진 기성품을 단방에 결제하는 간편한 소비보다 진정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 우리 사무소와 함께 주택을 짓는 건축주들은 최소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수고하게 된다. 설계 기간만 3~5개월, 인허가와 시공사 선정 2개월, 공사 5~6개월. 그리고 입주 준비까지. 짧지 않은 여정이다. 그에 비해 아파트는 정말 ‘요물’ 같다. 일정에 맞춰 돈만 준비하면 끝이다. 귀찮은 건 다 대기업이 알아서 해준다. 참으로 편하다.

결과물만큼이나 그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도 의미를 두고 작업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그에 따른 결론은 어떠한가? 쉽지 않은 건축의 전 과정을 거치고 난 후, 그 결과물에 대해 건축주들은 저 ‘자이’보다 더 만족하고 있는가? 더불어 우리도 그러한가?

여러 생각과 고민이 오가는 가운데, 하나만큼은 분명해졌다. 기꺼이 이 손이 많이 가는 여정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그 과정을 우리와 함께 즐겨준 건축주들에 대한 고마움이다.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분들, 지금 함께하고 있는 분들, 그리고 언젠가 우리를 찾아올 분들까지,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 물론 아파트를 설계하는 수많은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소비자의 시선에서 과정과 결과를 바라본다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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