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원 건축사(사진=도담건축사사무소)
이석원 건축사(사진=도담건축사사무소)

그 시절 대부분의 건축학도들이 그랬듯이 TV 프로그램 ‘러브하우스’를 보며 건축의 꿈을 키웠고, 시트콤 속 대학생활을 보며 캠퍼스의 낭만을 그렸다. 물론 현실은 꿉꿉한 반지하 설계실에서 밤을 새우는 나날이 많았다. 하지만 종이 위에 선을 긋고 동선을 계획을 하다 보면, 종이 위 공간 속에서 가상의 인물들이 러브하우스 집주인들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생활하는 모습을 떠올라 너무 좋았다.

지금도 계획을 할 때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우리 가족을 도면에 투영하고, 내가 이 건물주라면 어떻게 공간을 활용할까를 생각하며 검은 화면에 선을 그린다. 그리고 출력된 도면을 보고 마치 내 집인 것처럼 내적인 자존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그것이 내가 이 일을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작한 이유이고,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계획이 끝나는 순간, 나는 예쁜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수많은 법규와 해석의 차이, 지역마다 제각각인 불문의 내규들, 때로는 불법에 준하는 구시대적인 설계 변경 요청들, 그리고 시공사 편의를 이유로 쉽게 무시되는 계획안까지. 심혈을 기울여 예쁘게 만들어 놓은 필자의 ‘러브하우스’를 누군가가 부숴 버리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묻는다. ‘이게 내가 바라던 건축이 맞을까? 그래도 건축사인데 여기서 굽히는 게 맞을까?’ 어디까지가 내 자존감의 마지노선인지 매일매일 질문받고, 8년 전 개업을 하면서 처음 계획했던 마지노선은 어느새 아득히 저- 먼 앞에 있다.

그래도 손은 계속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 뒤에 ‘리얼하우스’가 있다. 결국은 현실과도 타협하는 것이 이 일이고 그렇게 훈련받아 왔다. 그리고 당장 그릴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 것이 다행인 현실이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으며 버틴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흘려보내고, 그렇게 묵묵하게 ‘러브하우스’를 꿈꾸며 다음 도면에 다시 마음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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