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함께한 어느 여행지의 오후, 머물던 숙소 로비 한쪽에 작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여행의 설렘을 잠시 내려놓고 그 책장 앞에 서 있던 내게 익숙한 표지가 하나 들어왔다. ‘슬램덩크’.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돌아가며 읽던 만화책이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 뒷자리에 모여 서로 순서를 정해가며 읽고,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에 웃고 떠들던 그 시간들. 책장을 넘기자, 마치 오래된 앨범을 펼치듯 그 시절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교복을 입고 농구공을 드리블하던 친구들, 여름날 체육관에 가득하던 땀 냄새와 웃음소리까지. 그 작은 만화책 속에는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처럼 기억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소소한 계기로 불쑥 찾아온다. 문득 영화 건축학개론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나 함께 집을 짓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과거의 감정과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설계도와 자재, 캠퍼스와 바닷가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을 되살리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를 보며 느꼈던 묘한 울림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장소와 감정 사이의 연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때때로 말보다 공간에 더 깊이 새겨진다. 내가 걷던 길, 앉았던 자리, 함께 바라보던 풍경 속에 그때의 마음이 스며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지나친 도심의 한 골목에서도 그런 감정을 다시 느꼈다. 눈앞에 서 있는 건물은 내가 몇 해 전 직접 설계하고 공사까지 함께했던 프로젝트였다. 이제는 거리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모습이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첫 현장답사에서의 설렘, 클라이언트와의 긴 회의들, 예상치 못한 문제들로 밤을 새워 도면을 수정하던 날들, 그리고 완공 후 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까지. 그 시간들은 단순히 업무의 기록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그 건물 앞에 다시 서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시간이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지만, 동시에 시간을 담는 일이기도 하다. 도면 위의 선 하나, 창의 위치 하나, 자재의 질감 하나까지 모두 그 공간을 채울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염두에 두고 결정된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건물 속에도 누군가의 노력과 감정이 스며 있다. 나에게 건축은 단지 형태를 짓는 작업이 아니라, 기억을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 내가 설계하고 있는 이 공간이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시간이 흘러 다시 그 공간을 찾았을 때, 그 안에서 자신의 과거와 조우할 수 있기를. 건축은 그렇게, 조용히 기억을 품고 있는 풍경이 되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