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는 조선 시대 왕명의 전달, 음식물 감독, 청소, 궐문 수직 등 궐내의 잡무를 맡아보든 내시부의 벼슬아치를 이르던 용어이다. 본래 고려 시대에는 숙위 혹은 근시(近侍) 관원이었으나,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여 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조선 시대 내시는 내시부(內侍府)에 소속되어 종2품직 상선(尙膳)에서 종9품직 상원(尙苑)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였다. 내시 제도는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내시의 유래
내시는 고려 시대에 급제와 같은 개인적 능력과 가문이라는 혈연 배경을 고려하여 선발하였다. 주로 문반의 관료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내시적(內侍籍)이라는 별도의 명단이 작성되었다. 이렇게 내시가 된 이들은 애초 지니고 있던 문반 관직과 함께 내시라는 두 개의 관직을 지니게 되어 복수의 업무를 수행하는 겸직(兼職)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내시의 규모는 인종 대에 임완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고려 문종 대에는 10여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숙종 대 이후 30~40명 수준으로 확대된다. 무신 정권기에 50명이 넘는 수준까지 확대되기도 하지만,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무신(武臣)들이 명예를 탐하는 자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존재감이 약해지던 내시는 공민왕 대에 내시부(內侍府)가 등장하면서 관료들로 충원하던 근시 조직에서 환관으로 구성되는 근시 조직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태종과 세종 때를 거치면서 녹봉 지출이 많은, 품계 높은 내시직을 폐지하는 대신에 하위직을 늘렸다. 그런 후 세조가 집권하자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 차원에서 내시부 인원을 적절하게 줄였으며, 성종 때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조선의 내시부 체제가 완연하게 틀을 갖추었다. 이에 의하면 조선 시대 내시는 모두 140명 내외를 둘 수 있었다.
근세에 들어와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몇 개의 유사한 관서를 합하여 내시사(內侍司)로 개편하면서, 대전 소속 내시 50명, 대비전 10명, 중궁전 10명, 세자궁 20명, 세자 빈궁 8명, 세손 궁 15명, 세손 빈궁 6명 등 모두 120명의 내시를 두었으나,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 하면서 내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국내 유일의 내시 가옥
운림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에 위치하며 ‘임당리 김 씨 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의 궁중 내시였던 김일준이 낙향하여 19세기 후반에 건립한 주택으로 임진왜란 전부터 400여 년 동안 16대에 이르는 내시 가계(內侍 家系)가 이어져 온 곳이다.
운림고택은 5칸의 솟을대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큰 사랑채, 오른쪽으로 중사랑채를 두었다. 대문, 다른 건물들은 서남 서향이고, 큰 사랑채, 곳간채는 남향이다. 큰 사랑채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측면 2칸으로 2칸 사랑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이다. 중사랑채는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고 왼쪽의 1칸이 중문으로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방 3칸, 마루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거의 북향이고 앞에 작은 고방채로 마당을 막았다. 안채와 작은 고방채 그리고 서쪽의 큰 고방채로 인해 미음(ロ) 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 뒤쪽으로 장독대가 있고 중사랑 남쪽에 사당이 있다. 안채는 대궐을 향해 북향한 형태로 정면 6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다.
이 가옥에는 내측(內厠)이 큰 고방 끝에 있다. 고방 남쪽에는 뒤주를 두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이다. 본래 큰사랑 뒤에 광이 있었고 사당의 동쪽에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운림고택은 신분적 특수성이 있는 인물이 지은 가옥이고 임진왜란 전부터 오랫동안 세거해 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내관의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88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1월 31일 국가 민속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로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출처 : 디지털청도문화대전
주소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2길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