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설계공모 판례 톺아보기

서울행정법원, “설계공모 익명성, 반드시 보장돼야”
문제제기한 A 건축사사무소 행정소송 승소

PPT 발표에서 실적 밝히고 질의까지, 중대한 절차상 하자
공정성 훼손 인정…당선 무효로 결론

해당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음. 사진은 한 지자체의 설계공모 심사 현장(사진=뉴스1)
해당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음. 사진은 한 지자체의 설계공모 심사 현장(사진=뉴스1)

최근 정부 기관의 산하 단체가 신청사 건립을 위한 설계공모를 추진한 결과, 중대한 하자가 있는 당선작을 선정했고, 이 설계공모에 참여한 A 건축사사무소의 행정소송 끝에 ‘명백한 절차상 하자’가 인정돼 당선 무효, 원고 승소 판결이 이뤄진 사례가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제12부는 지난달 설계공모 당선자 결정 무효 등 청구의 소에서, 피고(발주처)가 진행한 설계공모에서 B 건축사사무소의 공모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결정은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판결했다.

사건은 산림청 산하 ‘H’ 기관이 ‘제2023-05호’로 신청사 건립 기본 및 실시설계(일반 설계공모)를 공모해, 2024년 4월 당선자를 선정함에 있어 절차상 하자가 중대한 업체를 선정하면서 비롯됐다.

A 건축사사무소는 자신이 참가한 신청사 설계공모에서 B 건축사사무소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과정에 대해, PPT 심사 중 설계도판 및 설계설명서에 포함되지 않은 건축 실적 사례를 제시해 익명성을 위반했고, 중대한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발주처에 이의제기를 하고 기관장 면담을 신청했다.

발주처는 대응 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다”며 “기관장과 만날 이유도 없다”고 통보했다. 소통이 어렵다고 판단한 A 건축사사무소는 해당 발주처를 상대로 행정소송에 나섰다.

재판부는 “당선자가 본 심사에서 발표한 PPT 자료와 발표 내용은 익명성 원칙을 중대하게 위반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그럼에도 피고(발주처)가 해당 응모자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실격 처리하지 않고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중대하고 객관적으로 명백한 하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이번 사건의 설계공모는 설계자의 경험 및 역량, 수행 계획과 방법 등을 심사해 설계자를 선정하는 ‘제안공모’나, 발주기관 등이 정한 일정 기준에 따라 참여자를 제한하는 ‘지명공모’와는 구별된다”며 “따라서 일반 설계공모의 경우 모든 참여자가 제출한 안에 대해 공정하고 공평하게 심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심사위원들은 PPT 심사 과정에서 다른 응모자들과 달리 당선자의 발표자료에만 실적이 기재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도, 익명성 위반 여부를 검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해당 실적을 바탕으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이후 중계된 심사 방송을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익명성 위반 문제가 제기되자, 심의 과정에서 당선자 실격 여부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고, 실격 처리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B 건축사사무소의 당선이 최종 발표됐다.

재판부는 “심사위원회가 익명성 위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선자를 실격 처리하지 않을 권한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설령 심사위원회에 그러한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의결의 적법 여부는 법원의 사법심사 대상이 된다. 이 사건 당선작 결정에서의 익명성 위반은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로, 해당 의결로 그 하자가 치유됐다고 볼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1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지난 3월 서울행정법원은 “이 사건 당선자의 익명성 위반은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에 해당함에도 피고가 이를 당선작으로 결정했으므로, 해당 당선작 결정은 당연히 무효”라고 판결했다.

한편,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제9조(공모안의 제출) 제5항에 따르면 “발주기관 등은 공모안이 설계지침서 등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하며, 공모안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심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조건을 위배해 심사대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심사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는 제출 도서에 해당 업체를 특정할 수 있는 문구나 이미지 등이 들어 있는 경우도 해당된다.

현장 인터뷰

설계공모에서 익명성 위반은 응모 자격 박탈 사유

공정성 위반한 설계공모, 당연무효서울행정법원 판결
건축사와 발주처 모두 제반 규정 철저히 준수해야
 

남광순 대표 변호사, 법률사무소 예지(사진=남광순 변호사)
남광순 대표 변호사, 법률사무소 예지(사진=남광순 변호사)

명백한 하자가 있는, 그래서 공정성 위반이 분명한 설계공모 결과는 당연 무효라는 것을 확인한 의미 있는 판결입니다.” 원고 측 소송 대리인인 남광순 변호사(법률사무소 예지)는 소송 후 이번 판결에 대한 소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발주처가 공정하게 설계공모를 진행하는지에 대해 꾸준한 모니터링은 필수이며, 건축사들 역시 공모지침서 등 제반 규정을 반드시 준수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설계공모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판결의 주요 쟁점에 대해 일문일답을 통해 짚어봤다.

Q. 지난 3월 서울행정법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어떤 소송이었고, 일반적인 계약관계 소송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답변 부탁합니다.
‘H’ 기관은 청사 이전을 위해 신청사 건립 및 실시계획(일반 설계공모)’을 공고했습니다. A건축사사무소 등 다수의 건축사사무소가 해당 설계공모에 응모하게 됐고, ‘H’ 기관은 응모자들의 제안서 발표 및 심사를 거쳐 B건축사사무소가 응모한 설계 도면을 당선작(1)으로 선정했으며, A건축사사무소를 입상작(2)으로 선정하는 한편, 당선자인 B건축사사무소와 설계용역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대해 A건축사사무소는 ‘H’ 기관장을 상대로 당선자 결정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는데, 위 소송은 당선자가 아닌 A건축사사무소가 ‘H’ 기관장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으로, 통상 처분 당사자 간 제기되는 행정소송이나 계약 당사자 간 제기되는 민사소송과 구별되는 소송 구조입니다.

Q. 결론적으로 보면 설계공모 과정에서 명백한 절차상·실체상 하자가 있었고, 때문에 당선작 결정은 당연무효라는 판결이 이뤄졌습니다. 재판부는 어떤 점을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로 인식한 것인가요?
공모 지침서 등 설계공모 관련 제 규정에는 응모자들이 익명성을 철저히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를 위반할 경우 응모 자격을 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당선자인 B건축사사무소는 PPT 발표 과정에서 자신이 제출한 설계도판 및 설계설명서만으로 구성하지 않고 과거 실적을 포함해 발표했고, 더 나아가 심사위원이 그 실적에 관해 질문까지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재판부는, 위와 같은 행위는 익명성에 대한 제 규정을 중대하고도 명백하게 위반한 것으로, 응모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Q. 명백한 하자라는 선고가 있었음에도 발주처인 피고는 항소를 제기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항소심에서는 어떠한 쟁점으로 소송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까?
피고는 이미 항소를 제기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원고가 위법 사항으로 제기한 익명성 위반, 공개심사의 원칙 위반, 심사위원 구성에 대한 위반, 심사위원의 기피·회피 원칙 위반 주장 중 익명성 위반이 너무나 중대하고 명백하므로 익명성 위반 하나만으로도 당선자 결정을 무효로 판단하고, 나머지 위반 사유에 관해서는 나아가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피고는 항소심에서 익명성 위반 여부를 핵심 사항으로 다툴 것이나, 원고가 제기한 나머지 위법 사유도 중대하고 명백함으로 이 부분 또한 항소심의 주요 쟁점 사항이 될 것입니다.

Q. 경기 불황에 따른 민간 건축 위축으로 인해 많은 건축사사무소들이 설계공모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건축사들이 설계공모에 참여할 때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개별 건축사뿐만 아니라 건축사 단체들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실시하는 설계공모 절차가 공정성이 담보되도록 진행돼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습니다. 이번 재판은 설계공모 과정에서 공정성이 위반될 경우 그 결정은 무효가 될 수 있으며, 무효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명백히 보여준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번 재판을 계기로, 설계공모에 응모하는 건축사들은 공모 지침서 등 제반 규정을 면밀히 검토한 후, 준수해야 할 사항을 명확히 인지하고 철저하게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발주처가 공정하게 설계공모 절차를 이행하는지 심사 과정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그 과정에서 위법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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