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가을비가 종일 바람에 날립니다.
전기가 부족해서 블랙아웃인가 뭔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도 엄포를 놓는 통에 이번 여름에도 우리 집 에어컨은 거실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서 있었습니다.
온갖 원망 다 하면서도 애국심으로 단단히 무장[포장]한 저의 고집을 끝내 꺽지 못한 아내는 열대야에도 창문을 닫는다는 이유로 여름 내내 저를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 북쪽에서 살살 밀려오는 북풍에는 그녀도 뒤 베란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어느 극작가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보니 오십대 중반을 넘겼습니다. 요즘 매체마다 ‘실버’ ‘시니어’라는 단어가 넘쳐나고 모든 통계수치는 우울하고 어두운 미래를 다양한 방법으로 예측해 보이려고 합니다. 시대에 발맞추어 각종 보험과 연금 상품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베이비부머가 있고 그중에서도 ‘58년 개띠’가 단골메뉴인데 황송하게도 제가 58년 개띠입니다.
사십 줄에 들어가면서 얻어맞은 IMF로 불혹이 아니라 여기저기 먹고 살 이야기만 들리면 혹해서 좌충우돌 쫒아 다니면서 10년을 보냈고, 오십 줄에 들어서서는 세계금융위기로 그나마 강북에 하나 가지고 있는 아파트조차 반 토막이 나버렸습니다.
영원한 ‘을’이라고 자포자기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건축주만 ‘갑’입니다. 그러나 공무원과 민원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시행자와 시공자도 저에게 ‘갑’이 된지 오래입니다. 때로는 이들이 ‘왕갑’, ‘수퍼갑’ 행세도 하는 세상에 수십 년 살았습니다.
성격이 불같은 제가 젊어서 잘 나갈 때는 수천만원짜리 설계도면을 상종 못할 건축주 앞에서 찢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 박아버리는 호기를 부린 적도 있습니다.
청사진 도면 뭉치를 더러운 왕갑 행세하는 건축과 공무원 책상 위에 패대기를 치기도 했습니다. 설계자를 우습게 아는 시공자 엎어 놓고 구두발로 목을 밟아 버린 적도 있습니다.
저같이는 못했어도 이런 심정으로 건축을 하는 ‘士’가 한둘이겠습니까? 다만 저는 애당초 가진 것이 없으니 제 성질대로 건축을 하면서 세상을 살다 가겠다고 작정했을 뿐입니다.
최근에 삼일 상간에 친구 둘이 세상을 떴습니다. 한 친구는 IMF 이후 망가지기 시작해서 회복을 못하고 십년 이상을 술로 세월을 보낸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또 한 친구는 유능한 구조기술사로서 신장 재이식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는데 황망하게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영정 앞에서 곰곰 생각해 보니 정말 세상살이가 별것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면.
저도 이제 시니어의 대열에 들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반 실버입니다. 아이들은 저보다 더 커 버렸습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평균 수명까지 먹고 살 돈이 안 됩니다. 그러니 계속 벌어야하는데 도대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한 달에 오십 만 원이라도 고정 수입이 가능한 실버산업에 대해 몇 년 째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 지인에게서 재판을 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억울한 사연이라서 저 같으면 아마 홧병으로 중환자실에 있었을 이야기였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상대편, 즉 피고 측 변호사가 법정에 제출하는 사실 확인서들이 전혀 사실과 다른 조작된 내용이었다는 것인데요. 그건 아마도 그 법무법인의 변호사가 정말 자기 측 의뢰인이 이기도록 하는데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변호사였던 모양입니다. 재판 기간 중에 너무 억울해서 밥도 못 먹고 잠도 재대로 못잔 모양입니다. 1차 재판에서 그는 졌습니다. 그가 법원 앞에서 상대측 변호사를 보고 이렇게 쏴 붙였답니다. ‘돈 앞에 개 같은 짓을 하는...!’
제가 이렇게 두서없이 막 이야기하는 풀어놓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공감하는 건축사가 많을 줄 압니다. 돈이 흘러 다니는 세상 물정에 많이 어둡고, ‘갑’이면서도 ‘을’이 갑 행세를 하면 그냥 갑 자리를 내어 주고, 먹고 살 대책 세우느라고 진 빼느니 트레이싱지에 스케치 시원하게 한 장 하는 것이 더 세상 살 맛 난다고 생각하는 저와 비슷한 건축사님들!
앞으로도 ‘돈 앞에 개 되는 일’ 없이 성질대로 삽시다.
오늘처럼 가을비가 내리는 날.
자주 못 만나는 건축쟁이들과 안부 전화라도 하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