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계약에 약한 나라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회사 담당자 또한 어떠한 계약을 체결하려고 하면 “변호사님, 혹시 관련 계약서 샘플 파일 있을까요?”하고 물어오는 경우가 많다. 계약의 주체 스스로가 자신의 중요한 권리·의무가 무엇이고, 어떠한 것이 중요한 체크포인트인지 파악하지 못하며, 계약 체결 시 넣고 협상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익숙하지 않다.
많은 이들은 ‘숫자’, 즉 계약 금액에 주로 관심을 두고, 나머지 조항을 심사숙고하여 검토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분쟁 해결 시 관할 합의 조항이다. 예컨대, 당사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건축주 주소지의 전속 관할로 한다”는 조항이 있다면, 서울에 있는 건축사가 제주도에서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원인이 계약의 당사자인 개인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필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실정법 체계라는 이유, 소위 대륙법계 법제라는 이유로 당사자의 권리·의무를 계약보다는 법령이나 행정 권한을 통해 ‘법적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사적 권리·의무에 개입하고 있다. 분야별로 국가가 배포하는 표준계약서나 각종 분쟁조정위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이유로 계약이라는 당사자 간 권리·의무의 근간이 제대로 논의되고 고민될 수 없는 토양이 지속적으로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건축사님들은 어떠한 접근 방식으로 설계 계약을 체결하는가? 아마 많은 분이 국토부에서 제정·고시한 ‘건축물의 설계 표준 계약서’([시행 2019. 12. 31.] [국토교통부 고시 제2019-970호, 2019. 12. 31., 일부 개정])를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또는 사업 시행자가 대규모 건축을 진행하는 경우, 건축주 측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설계 계약서를 접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건축 설계 계약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건축설계 계약, 도급계약과 위임계약 성질 모두 가져
계약 체결 시 보수 청구권 명시하는 것 중요
분쟁 해결 조항도 신중히 검토해야
계약서 작성 전 전자우편·카카오톡 등 활용해
보수 청구 증거 마련해 둬야
본론으로 들어가 건축물 설계 계약을 체결할 때, 건축사의 입장에서 어떠한 요소를 챙겨야 하는가? 그 출발점은 건축물 설계 계약의 법적 성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현행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건축물 설계 계약은 공사 도급 계약과는 약간 다른 성질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즉, 건설 공사 계약의 경우 전형적인 민법상 ‘도급 계약’의 성질을 가진다. 도급 계약이란 일을 완성하여 그 결과물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민법상의 계약이다. 즉, 완성을 하지 못하면 그 대가, 예컨대 건설 공사 대금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건축물 설계 계약은 설계 도서를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도급 계약의 성질을 가지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건축사가 재량의 범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위임 계약의 성질을 함께 가진다는 소위 ‘혼합형 계약’으로 보고 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8. 5. 16. 선고 2016가합554872 판결 등). 참고로 공사 감리 계약의 경우에는 ‘위임 계약’의 성질을 가진다고 본다(대법원 2001. 5. 29. 선고 2000다40001 판결 등).
그러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도급 계약의 경우에는 도급 보수, 즉 설계 보수가 필수적인 요소이며, 위임 계약의 경우에는 별도의 약정이 없다면 무상(소위 공짜) 계약이 원칙이다. 여기에 중요한 함정이 있다. 예를 들어, 건설 공사 시공사가 구두로 약정한 후 공사를 시행하면서 건설 공사 대금을 청구하는 경우, 도급 계약의 성질을 가지므로 당연히 기성고 등에 대한 대금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사가 설계 용역을 계약서 없이 진행했다면, 즉 구두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했더라도 이를 입증하기는 어려우므로, 기획 및 계획설계를 제공하더라도 도급 계약인 건설 공사와 달리 해당 기성고에 대한 설계 대금을 청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건축사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설계 계약을 체결할 때 보수 청구 부분을 정확히 명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야만 설계 계약이 도급 계약의 성질을 가지거나, 적어도 보수 청구권이 있는 위임 계약의 성질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건축사가 건축주와 초기 단계에서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설계를 맡기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초기 상담, 자문, 기획 설계 등 일정 단계별로 비용을 청구할 금액을 반드시 증거로 남겨야 한다. 예컨대, 많이 사용하는 전자우편(email), 카카오톡 등 SNS 서비스, 전화 또는 회의 녹음 등을 통해 증거를 확보한다면, 설계 계약서가 정식으로 서면으로 작성되지 않더라도 그때까지 수행한 설계 컨설팅 용역에 대한 보수를 청구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 진정한 선진국형 산업이 정착되려면 재화뿐만 아니라 용역의 진정한 가치도 존중받아야 하며, 그 출발점은 건축 설계 보수 청구권의 명확한 약정임을 강조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