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전 신도시 분당에 국내 최초로 주택전람회가 열렸다. 국토개발원이 제안하고 토지개발공사가 주관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내놓으라하는 건축사들을 선정해 대지를 분배해 설계하게 했고 각 건축사의 작품마다 시공자가 지정되었다. 이 해프닝이 한국 건축의 현 주소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였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용두사미가 되었는데 장사가 안 될 것 같았는지 포기한 시공사가 나오게 되고 결국 전체 규모의 반 정도만이 지어지고 분양되었다. 유럽의 건축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건과 65년 전 독일의 주택전람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람회는 새로운 수익창출의 수단으로 20세기 초 독일에서 있었던 전람회의 형식만 표절한 분당의 것과는 다르게 SF영화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매트릭스( The Matrix, 1999)에서 나오는 ‘빨간약’과 ‘파란약’ 선택의 순간만큼 유럽 근대건축흐름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 주택전시는 1907년에 결성된 독일공작연맹과 1926년경에 결성된 독일 건축사들의 사조직인 ‘데르 링(Der Ring)’의 주도로 유럽국가의 건축가들을 초빙해 1927년 스투트가르트 근교 바이젠호프 언덕에서 개최되었다.(그림1) 이 전람회는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거주형식에 대한 실험,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공간에 대한 논의, 최신 시공방법의 적용 그리고 표준화와 같은, 당시 유럽사회에서 건축이 당면한 중요한 이슈들을 내세웠지만 전 후 독일 자국의 경제적 역량을 유럽시장에 알리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행사는 당시 독일공작연맹의 회장이었던 미스 판 더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와 데르 링의 총무였던 후고 헤링(Hugo Haring, 1882-1958)의 극명하게 다른 건축적 태도로 인해 시작부터 불씨를 안고 출발했다.(당시 미스와 헤링은 독일 건축계의 소장파 건축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사무실을 공유했던 절친이었다.)

초기 마스터 플랜을 보면 이 둘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헤링의 안은 각각의 건물들이 대지의 물리적 맥락에 반응하여 독립되어 있지 않고 다른 건물과의 관계 속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림2) 그러나 이 안은 독일공작연맹 측에서 실현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고 미스가 이를 수정하여 제시하게 된다. 수정된 안을 보면 각각의 건물은 독립된 하나의 오브제로 대지의 물리적 맥락과 거리를 둔 채 배치되어 있다.(그림 3) 이 극명한 태도차이로 인해 둘의 심기는 이미 불편해 질대로 불편해 져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불거진다. 전시에 참여하는 건축가들에게 지급되는 적은 설계비 문제였다. 헤링은 진취적 건축집단의 총무로서 정상적인 설계비를 요구했으나 독일공작연맹의 회장 및 전람회의 책임자로서 미스는 최초이자 중요한 건축사건인 만큼 전향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헤링과 데르 링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에릭 멘델존(Erich Mendelsohn, 1887-1953)은 참여자 명단에서 스스로 빠지게 된다.


이 같은 불화는 1년 뒤 불어권 건축사를 중심으로 기획된 제 1회 CIAM(근대건축국제회의)에서 독어권 건축사들의 분열로 이어져 초기 응집력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헤링은 이 같은 국제적 건축사 모임을 1년 전 먼저 제안을 했지만 미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것마저 사장되어 버렸다.
건축적 이견으로 시작해서 행정적인 문제까지 번져버렸지만 건축적 갈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덜란드 근대건축운동인 데 스타일(De Stijl)과 벤딩헨파(Wendingen)의 경우에서도 보듯 새로운 건축을 추구한다는 지향점 아래 건축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달리 보면 담론의 풍부함을 의미한다. 풍부한 담론과 논쟁은 건강한 긴장감과 에너지를 발산해서 또 다른 담론의 생성을 유도한다. 비록 국제적 전람회를 표방했지만 참여건축사 16명 중 독어권 건축사가 14명(네덜란드 2명, 오스트리아 1명 포함)이었다.(그림 4) 따라서 이 행사는 표현주의라는 독어권의 예술이념아래 미스를 중심으로 순수를 표방한 이성주의자들과 헤링을 중심으로 유기적 태도를 지향한 기능주의자들이 앞에서 언급된 4 가지의 건축적 이슈들에 각각 다르게 반응한 결과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그야말로 아직 정치적 때가 묻지 않은 독일 근대건축담론의 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가 어찌 정치, 권력과 떨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 사건에 자극받은 불어권 건축가들의 주도로 1928년 스위스에서 건축사 국제회의가 열리게 된다. 물론 이 자리엔 1927년 전람회에 참가한 데르 링의 건축사들과 헤링이 초청받아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다양성을 전제로 하지 않았던 이 회의의 최초 발의자 르 꼬르뷔지에와 지그프리트 기디온(Sigfried Giedion, 1888-1968)은 주도면밀하게 담론의 단순화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미스의 태도를 견제했던 움직임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약해졌고 급기야 1933년 아테네 헌장을 발표하며 이성주의자들은 상징적 승리를 선언했다.

자국의 건축적 역량을 유럽에 선 보이려 시작했던 이 전시는 또 다른 움직임을 태동 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독일의 근대건축운동을 분열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도 있다. 국제주의건축사들의 공공의 적이었을까 꼬르뷔지에는 기디온에게 청어를 그려 보내며 헤링의 건축적 사망을 즐거워했다고 한다.(그림 5/헤링은 발음상 독일어의 청어와 비슷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