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들어 미술관을 다룬 건축 서적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미술관 자체보다는 소장된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도록이 화가별 또는 미술 시대별로 분류돼 작품에 대한 설명 및 이해를 위해 출간되었다면, 최근에는 작품보다 미술관 자체를 소개하는 책이 많이 눈에 띈다.

이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니 시대가 변했음이라. 50대 줄로 들어선 나를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유럽에 있는 미술관에 직접 가서 그 도록에 실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

회상해 보니 컬러 상태도 썩 좋지 않은 도록이지만 화가 페테르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그림에서 표현된 벨벳 드레스 질감의 부드러움과 투명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귀족부인의 귀품을 드러내는 망사레이스와 장식,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그림에서 여인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상기된 표정과 풍만한 가슴에 드리워진 햇살의 생동감이 얼마나 나를 자극했던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 무거운 도록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보고 또 보고, 그렇게 하나씩 내 기억 속에 오롯이 새겨져 있던 작품들은 결국 나를 움직여 미술생도가 되게 했고, 지금까지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게 했다.

글로벌시대에 사는 지금 유럽 미술관여행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된 것 같다. 초등학생부터 은퇴한 노부부까지 루브르,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모던 등에서 마주치는 많은 한국 관광객을 볼 때마다 세상이 좋아졌음을 새삼 실감한다.

미술관에서 오리지널 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특별한 감동의 경험을 선사한다. 그 감동의 여운은 새로운 자극으로 이어져 화가에 대해 탐구케 하고, 그를 있게 한 시대의 역사까지 관심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시각적으로 살아있는 붓 터치, 생기 있는 색감. 보고 있노라면 작업실에서 화가의 등 너머로 그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고, 조각품의 거친 끌 자국에서 그 현장감에 사로잡혀 소름이 돋을 때도 있다.

이 진한 감동의 전달이 작품으로만 가능할까? 분명 아닐 것이다. 작품의 배열, 그것들을 아우르는 공간, 동선과 벽체의 색감, 조도와 색온도, 실내온도 등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감상하는 데 최상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세심하게 계획된 건축공간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 왕실 컬렉션을 공공에게 공개하기 위해 루브르 미술관을 위베르 로베르(Hubert Rebert)에게 위임했던 그 계획과 운영에 대한 자료를 보면, 기본적으로 작품의 전시는 물론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직접 보고 연마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 개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부분의 미술감상이 시각적 감각을 주로 사용했던 시기의 작품 전시에서는 공간의 변화가 중요하지 않았지만, 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보는 감각을 넘어 다양한 지각의 감각 경로를 통해 인식되는 작품으로 변화하면서, 미술관은 고전적 기능에서 감상자의 문화향유 방식 및 지각의 급진적 변화와 현대미술이 조형예술에서 벗어나 미술의 시간성과 운동성을 도입하는 그 확장성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공간으로 요구받고 있다.

이 확장된 개념에 거대자본이 투입되면서 미술관은 본연의 기능 외에 도시 활성화 및 재생을 위해 계획적으로 시도됐고,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베니스에 있는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ugana)와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의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이에 더 나아가 도시 브랜드의 전략으로 충격적 형태와 소재를 적용해 빌바오 이펙트를 이끌었던 구겐하임 빌바오(Gaggenheim Bilbao), 도발적인 비지니스 모델로 변신, 확장하고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거대한 복합기능의 시도는 문화와 예술이 이 시대를 리드하고 있는 현재, 미술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구축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미술관이 이제 더 이상 감상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 문화사업의 틀에서 벗어나, 오히려 문화적 자본을 창조해내는 중요한 씨드머니(Seed money)가 되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어린 시절 도록을 통해 접했던 명화에 대한 막연한 감상이 미술관에서 생생한 경이감으로 경험되었고, 이는 나를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듯이, 미술관은 총체적으로 경험되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작금에 너무 거대한 규모와 기이한 형태의 범용적 공간기능에 밀려 오히려 주역인 작품이 건축공간의 장식물에 불과한 수준으로 까지 인식되지는 않는지... 순수한 제 기능을 내어준 미술관의 제 모습이 안타깝다.

하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유수한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열린 기능으로의 제 몫을 당당히 일궈내고 있는 두 미술관은 아직도 나를 기쁘게 한다. 쾰른에 있는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 설계의 콜룸바 미술관(Kolumba Museum)과 베니스의 팔라조 포투니(Palazzo Fortuny) 미술관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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