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의 대규모 어항 중 하나인 구룡포는 현 포항 시가지인 구 포항읍(1931년 승격) 다음으로 포항시에서 두 번째로 승격된 읍이다. 포항에서 상당히 큰 마을이었으나 포항 시내로의 이촌향도 현상과 힘든 어업을 기피하는 풍조로 인해 현재는 규모가 많이 줄었다.

구룡포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 현감이 각 마을을 순찰하던 중 사라리 마을을 지날 때 별안간 천둥과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때 앞바다에서 10마리의 용이 승천하는데 한 마리가 떨어져 용이 아홉 마리만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인 가옥거리. (사진=김진섭 건축사)
일본인 가옥거리. (사진=김진섭 건축사)

일본인 가옥거리
구룡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어부 이외에는 가족의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나가는 정도였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구룡포는 최적의 어업기지로 떠올랐다.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일본인 수산업자가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제안하였고, 큰 배가 정박할 곳이 생기자 수산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몰려왔다. 방파제를 쌓아 생긴 새로운 땅에는 일본식 가옥이 빼곡히 들어섰고, 일본 어민의 이주와 함께 일본인 상인의 정착도 이루어졌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채 남아 있던 일본인 가옥은 현재 50채가량 남아 있다. 2012년 포항시가 광복 이후 구룡포에 남아 있는 80여 채의 일본 가옥을 중심으로 ‘근대문화 역사 거리’로 조성했고 특히 구룡포에 최초로 거주한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의 집은 일본인의 생활상을 재현한 근대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룡포 근대 역사관 전경. (사진=김진섭 건축사)
구룡포 근대 역사관 전경. (사진=김진섭 건축사)

아픈 기억을 품은 근대 역사관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 거리의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일본인 가옥 거리가, 오른쪽으로는 근대 역사관이, 계단을 오르면 구룡포 공원이 위치해 있다. 입구의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구룡포 근대 역사관이 나온다. 이 건물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선어 운반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부를 쌓은 사람으로,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여 '구룡포 근대 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 내부의 부츠단, 고다츠, 란마, 후스마, 도코바시라 등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으며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의장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이 건물은 한국과 일본 건축 전문가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대상으로 삼는 건축물로 그 가치가 크다.

구룡포 공원에서 본 전경. (사진=김진섭 건축사)
구룡포 공원에서 본 전경. (사진=김진섭 건축사)

근대 역사관을 나와 왔던 길을 따라서 걸으면, 좌우로 늘어선 일본의 적산가옥을 볼 수 있다. 마치 한적한 일본의 마을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골목이다. 적산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골목은 마치 일시 정지라도 한 듯이 그 시절의 기억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채 멈춘 것 같다. ‘구룡포 100년을 걷다’가 적힌 전봇대를 따라 걷다 보면 음식점을 비롯한 일본 전통 의상인 유카타를 입어 볼 수 있는 체험시설, 일본식 전통찻집 등 다양한 상점이 줄지어 있다.

공원에 올라서면 구룡포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곳은 원래 일본인이 세운 신사와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가 있던 곳이다. 해방 이후 구룡포 청년들로 구성된 대한청년단 30여 명은 신사를 부수고 송덕비에는 시멘트를 부었다. 현재 구룡포 공원에는 대한민국 순국선열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여명의 눈동자’,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로 유명하다.

출처 : 나무위키
주차장 주소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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