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뻤다. 날은 아직 쌀쌀했고. 우린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만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딱 두 시간씩.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대뜸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적혀 있는 낯선 이름. 사진가라고 했다. “이 사람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 봐요.” 쉽진 않았지만 사진을 고르자 이번에는 “컴퓨터 바탕 화면에 띄워놓고 계속 보세요. 햇살 좋은 날, 비가 오는 날,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에도 … ” 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참, 아직은 작가나 사진에 대해서 찾아보면 안되요.”

사진의 첫 인상은 한 마디로 ‘꽉 막힌 느낌’이었다. 둘째 날, 사진 속 의자에 눈길이 갔다. 홀로 놓여있는 의자가 되게 쓸쓸해보였다. 셋째 날, 의자가 벽면에 둘러싸여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넷째 날, 의자가 고통 속에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사진 중앙의 한 줄기 빛처럼 의자가 밝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사진의 주인공은 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봐요.” 2011년 열렸던 그의 전시 팸플릿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김형욱은 의자를 바다, 들판, 도시 속에 배치함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의자는 풍경과 함께 단순히 휴식을 위한 물체의 개념을 넘어 작가 자신을 대리하는 상징물로 표현된다. 거기에 심리적인 면을 더해 존재, 외로움, 기다림, 불안 등의 감성과 의미를 나타내는 텍스트로 사용된다.” 설명을 읽고 나니 사진 속 의자와 좀 더 깊이 공감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물었다. “이 사진을 보면서 혹시 마음속에 떠오르는 게 있나요?” 마침 연상이 되는 게 있긴 했다. 이 의자처럼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던 순간!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만큼 축구라면 사족을 못 썼다. 하지만 정작 골을 넣지는 못했기에 경기는 늘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반대표로 축구경기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반은 문제 반에다가 꼴찌 반이어서 당연히 질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그런데 바로 그 경기에서 내가, 짜릿한 결승골을 넣었던 순간이 기억이 났다.

그녀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 이야기(narrative)를 사진으로 표현해 볼래요? 글로도 써 보고. 음,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정해서 서간문 형식으로요.” 난 순한 양처럼 시키는 대로 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녀는 교수이고 난 이번학기 그녀의 강좌를 수강하는 학생이니 ….

사진을 찍고, 편지를 썼다. 고마운 이진호 선생님 정수리에게.

“정수리야, 많이 놀랐지? 네 사진을 찍게 된 건 나도 처음이야. 왜 너를 찍게 되었냐면, 그 경기 기억나니? 당시 그 축구 경기 떨어지면 우리 반은 그냥 만년 꼴찌 반으로 불리게 되는 거였잖아. 나는 공격수였지. 주위의 시선 때문에 더 엄청난 부담이 되었어. 그렇지만 결국 짜릿한 결승골을 만들었잖아. 무슨 골 세리머니를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놀라 흥분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담임, 이진호 선생님이 이쪽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계시는 모습이 보였어. 달려가서 안겼는데, 안겨서 내려다 봤는데, 니가 딱 보이더라. 그때의 케라시스 샴푸향과 먼지 냄새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 사실 이렇게 너를 떠올리게 된 건 김형욱 작가의 작품 때문이야.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양쪽에 벽면이 딱 버티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갑갑하고 어두침침한 느낌을 받았어. 그러다 앞에 놓인 하얀 색 의자가 나를 투영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부터 가운데로 빛이 쫘악 내려오면서 비치는 거야. 이 의자처럼 내가 주인공이 된 순간이 있었나, 그게 언제였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딱 네가 생각나더라.

그 당시의 축구하는 장면을 재연해서 찍어보거나 공차는 사진, 골대사진 등 여러 컷을 찍어보았어.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때의 내 심정이나 상황을 잘 보여주지 못했어. 김형욱 작가의 사진도 제목이 coffee break.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는 거래. 이상하지? 사방팔방 건물로 뒤덮여 있는 곳에서 커피타임이라니.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왜 이렇게 표현을 했을까 생각하며 더 감상해봤더니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 너, 정수리처럼. 사진을 찍을 당시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저 빛을 받고 있는 하얀 의자가 그때의 작가의 심정과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어. 만약 진정으로 어둡고 가라앉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흰 의자를 쓰지 않거나 가운데 빛을 놓지 않았겠지.

모든 것이 부담으로 옥죄여 오는 요즘,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생각하면서 사진 속의 한줄기 빛을 보고 떠오른 너. 그때 당시의 모발 상태나 냄새는 똑같지 않지만, 네 덕분에 축구를 더욱 좋아 하고 자신감이 생기는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아. 얼마 전에 네 주인이 결혼했더라, 이럴 때일수록 애기 보느라 집안에만 있지 말고 바깥바람도 좀 쐬고 두피관리도 좀 받아.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까 당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좋네. 건강하게 잘 지내. 창연이가.

 

* 이 글은 필자가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사진 매체를 활용한 내러티브(narrative)탐구" 라는 수업 에서 한 학생이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허락을 받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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