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안 쓸리는 것은

- 이진명

공동주택
밖의 계단을 비질하는데
안 쓸리는 작은 덩어리
죽은 나뭇잎 색깔의
알 수 없는 덩어리
이 꼼꼼한 비질에도
떨어지지 않는

지금 안 쓸리는 것은
지금 쓸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장맛비가 한차례 다녀간 뒤에
굳은 그것은 저절로 풀릴지 모릅니다
죽은 색깔의 그것은 빠져나갈지 모릅니다
굳이 더러울 것도 해로울 것도 없는
알 수 없는 성질이 왜 없을까요
지금 안 쓸리는 것은
지금 쓸 필요가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다음, 모든 일이, 다 끝난 뒤
그러니까, 죽음을 찾은, 뒤에는
저절로, 쓸리지, 않을까 합니다만
사는 동안 쓸렸으면 더 좋았을
계단 밖에 나와 앉은
꼼짝 않는 덩어리

- 이진명 시집 ‘단 한사람’ 중에서/  열림원/ 2004년

아이가 무서움을 모르듯 희노애락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용’에서는 ‘중(中)’이라고 한다. 그것들이 다 드러나면 어쩔 수 없이 여러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그런 단계를 넘어서 모든 일에 딱딱 맞아 떨어질 때를 ‘화(和)’라고 한다. 어떤 일의 ‘때’를 우리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저항을 느끼거나 선뜩 쉽게 손이 가지 않을 때, 우리는 시간을 기다린다. 산책할 때 반려견이 뭘 하는지 몰라도 하염없이 기다리듯이, 자기 자식들에게도, 친구에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그렇게 기다려 줄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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