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인간

- 장정일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장정일 시선집 ‘지하인간’ 중에서/  미래사/ 1996년

상이라는 게 밥상처럼 많아서 상을 받는 일도 좀 멋쩍게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김수영 문학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을 꼽으라면, 많은 시인들이 장정일을 들고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김수영은 한국 시의 방향을 바꿨고, 장정일은 그 길로 나아가 한국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심화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한국 시에 영원한 소년의 이미지로 남아 기성을 모욕하는 반항과 저항의 몸짓이 되었다. 그는 되바라지고, 권위를 비웃고, 체제를 조롱하며, 치장과 가식을 혐오하고, 취향에 과감하고, 그렇기에 착하다.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