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프랑스 건축사 도미니크 페로와 국내 사무소간의 소통을 위한 건축통역을 맡게 되었다. 긴 학부시절과 석사학위를 위해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담감과는 달리 대면회의 통역을 준비하면서 다시금 프랑스어로 된 책을 들추어 보고, 프랑스어로 된 영화를 보면서 귀를 틔우며,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 예상보다 즐거웠다.
프랑스에서도 만나보기 힘들었던 원로 건축사를 눈앞에서 직접 만나보고 미리 준비된 연설문이 아닌 건축사가 평소에 말하는 방식이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기회였다. 어느새 짧은 머리가 하얗게 변한 건축사는 모든 문화 차이나 의견 차이가 자연스러운 듯, 인자하고 세련된 매너를 유지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파리 13구에 위치한 프랑스국립도서관이다. 30대에 막 들어선 도미니크 페로 건축사가 당선된 첫 대형프로젝트이기도 했고, 당시 미테랑 대통령의 업적으로 남게 될 의미 있는 건축물이기도 했다. 필자가 주로 희귀한 자료를 열람해봐야 하거나 집중해서 뭔가를 해야 할 때에 자주 찾았던 도서관이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이 건축물이 대지에 자리를 잡은 방식이다.
센강에 바로 면한 대지이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열람실이나 주요 공간에서 센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구성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도미니크 페로의 선택은 정확하게 그 반대로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열람실과 폐가식 서가는 지상레벨보다 낮은 곳에 선큰 가든을 둘러싸고 파묻혀있도록 했고, 센강을 조망할 수 있는 레벨은 데크를 두고 비워두었다. 물론 이 거대한 데크의 네 귀퉁이에는 ㄱ자 모양의 행정동이 각각 서 있지만, 가장 거대한 공간이 가장 웅장하게 비워져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도서관은 말 그대로 지하에 파묻혀있지만 선큰가든의 멋진 조경과 채광으로 인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데크는 도시와 센강 사이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고 비워져 있기 때문에, 센강은 도서관 내부에서는 조망할 수 없지만 파리의 시민들은 건축물이 생기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센강에 대한 조망을 만끽할 수 있다. 사용자의 피부에 닿는 의자나 책상, 조명, 벤치, 책장의 정교하게 고안된 디테일도 너무나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관한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대지와 자연에 대해 건축물이 자리 잡는 방식과 그것을 담아내는 방법을 경청해 볼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해 보았던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과감한 자리매김 방식이나 미학적으로 정제된 것을 추구하는 그의 건축적 성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젊은 건축사로 이제 나의 길을 개척하고자 정신없이 가는 와중에 우연히 만났던 소중한 인연이기에 더 애착을 갖고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한국에 지어지게 될 도미니크 페로의 완성된 건축물을 기다리며, 그 공간이 예전의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