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 섬인 장도에 있다. 장좌리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었다.

간조시에만 장도 청해진 유적지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으나, 2009년 장도목교를 설치한 후로는 탐방객들이 목교를 건너 청해진유적지로 자유롭게 도보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청해진이 있었던 장도는 섬 전체에 계단식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적지 내에는 1만 명의 식수정으로 사용하였다는 청해정이 있어 지금도 맑은 물이 솟으며, 토성의 일부와 기와 파편 등도 출토되었다.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 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 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장도목교 건너로 보이는 청해진 유적지(사진=김진섭 건축사)
장도목교 건너로 보이는 청해진 유적지(사진=김진섭 건축사)

동북아 해상의 무역왕 장보고(張保皐, ?~846)
장보고는 신라 후기 인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복(弓福)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생각된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骨品制)라는 혈연에 바탕을 둔 신분제가 있었기에, 귀족 특히 소수의 진골 귀족이 아니면 중요한 요직에 나갈 수가 없는 사회였다.

신라 사회의 혼란과 골품제도의 모순을 경험한 장보고는 20대 초반에 당으로 간다. 이곳에서 장보고는 무령군에 입대하여 30세(819년) 즈음에는 병사 약 천여 명을 거느리는 군중 소장의 직위까지 올랐다. 무령군에서 퇴임한 장보고는 본격적인 무역 활동을 전개한다. 824년 산둥반도 적산포에 적산 법화원을 건립하여 불교를 지원함은 물론 당나라에 거처하는 신라인의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다.

9세기 초 해적들이 신라의 양민을 잡아다 중국에 노예로 파는 참상을 목격한 장보고는 이에 분노하여 신라로 귀국한다. 장보고가 흥덕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청해(완도)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막을 것을 건의하자 왕은 군사 1만을 주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지 1년 만에 해적이 소통되었으며 동북아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실시하였다. 청해진은 군사와 무역체제를 갖춘 군·산·상(軍·産·商) 복합체로서 존재하였으며, 동남아와 아라비아 상인이 오가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

장보고가 활동하던 당시 그의 힘과 위세는 실로 막강하였다. 발전된 항해술과 조선술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이슬람 상인들의 주 이용 항로인 동남아, 인도항로와 동아시아 항로를 연결함으로써 아랍으로부터 신라와 일본으로까지 연결되는 해상 실크로드를 완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하였다.

세계 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며 동북아시아에 단일 경제권을 구축했던 장보고는 841년 신라가 보낸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며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청해진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동아시아 해상의 패권은 송나라 상인들과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넘어가고 만다.

유적지에서 보이는 장보고 동상(사진=김진섭 건축사)
유적지에서 보이는 장보고 동상(사진=김진섭 건축사)

완도 청해진 유적지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 장도(將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진(軍鎭) 유적이다. 1984년 9월 사적 제308호에 지정된 완도 청해진 유적은 완도에서 목교(木橋)로 이어진 장도라는 섬이다.

해안으로 내려서면 청해진 유적지가 발견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목책들이 일렬로 나란히 묻혀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청해진 유적지가 발견됨으로써 그동안 문헌으로만 전해졌던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흔적들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완도 청해진 유적지는 발견 전까지 인근 지역 주민들이 밭으로 사용하는 등 오랜 세월 땅 밑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959년 태풍 사라 이후에 드러난 목책(원목열)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1년에서 1996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철저한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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