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의 김한섭家

김홍식교수, 부친 영향으로 전통건축 전공
한울문화재연구원 및 한국건축문화원 경영
민족건축론(1987 한길사)과 한국의 민가(1991 한길사)를 저술한 명지대학교 김홍식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민가건축연구의 권위자이다.
1975년 농촌주택조사 방법론을 발표한 이후 그는 지금까지 서울특별시(’77년) 및 경기도의 한옥조사보고서(’78년)를 필두로 10여건에 달하는 대단위 한옥조사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암사동 선사주거지, 소쇄원, 다산초당, 서울성곽 종합정비 기본계획 등 사적지에 대한 수많은 연구 및 용역보고서를 만든바 있다.
현재 그는 건축학과 교수 외에 산업대학원 문화재학과 주임교수를 겸하면서 직원이 60여명에 달하는 (재)한울문화재연구원과 한국건축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꾸준히 민가연구에 골몰하면서 유적의 조사 발굴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렇게 민초들의 근원을 캐는 한국건축사를 전공하게 된 것에는 그의 부친 故 김한섭 교수와 가계(家系)의 영향이 지대하다.
부친 김한섭 전남대 중앙대교수역임
일본대 시절 민족의식 싹터 졸업 후 박길용사무소로
전남대와 중앙대 교수를 역임한 김한섭(1920-1990)교수의 16대조는 연산군 때 김일손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서울에서부터 제주도에 들어(入島)가게 된다. 이후 어려운 삶을 이어가던 중 7대 조부에 이르러 크게 치부하였고 그 는 1674년(숙종원년)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자 곡식 수백말을 내놓아 구휼함으로써 가선대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어려운 처지로 전락하여 할아버지는 배를 만드는 선장(船匠)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조차 신인(神人)이라 칭할 정도로 그 기술이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를 이은 아버지도 목수가 되어 서울 덕수궁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1901년 27살 때는 궁내부 통신사 전화과 판임관 주사에 임명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라가 망하자 낙향하였고 제주에서 태어난 김한섭고수는 공부를 위해 제주에서 광주로 나와 송정공업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건축국에서 근무한다. 그는 만주국의 고등관리가 추천하여 일본대학 고공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한국인 유일의 박길용설계사무소에 입사한다. 이는 학창생활 때 싹튼 “민족의식에 고무되었기 때문”(건축가 김한섭. 토탈북스. 김정동과의 대담)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물에서 얼음이 나오지만 물보다 더 차다는 격언대로 자식이 더 잘돼주었으면 해.”라는 말이 성취되었다.
‘건축은 건축주 아닌 대다수의 인간을 위하여 존재’
그는 박길룡의 급서로 취업 3년 남짓이 지난 후, 일제의 징집을 피해 목포공업학교 교유(교사)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전남도청 영선계장, 1950년에는 전남대 조교수가 된다. 그리고 전쟁 중인 1952년부터 3년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연구원으로 수학하였다. 귀국 후 계속 전남대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김한섭건축연구소를 개설(1956), 광주와 제주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에는 상경하여 금성종합설계를 통해 작품활동을 하면서 홍익대, 중앙대 등에 출강하다가 1976년에 중앙대 교수로 부임하여 1985년에정년퇴임하였다.
그는 ‘사회적 환경건축의 이해’란 논고에서 “일본인들은 풍토주의적 사고에 연원하여, 우리나라가 반도이기 때문에 우리문화는 반도적 성질 즉 문화의 교량역할만 담당하여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며 이를 반박하였다. 그리고는 “한 민족의 과제는 역사 속에서 발생한 것이고, 이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갖는 것이므로 세계사의 보편적 방법과 자기민족의 특수한 방법에 의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질수 있다. 따라서 자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야 한다. 고로 전통주의 건축이란 과거 전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재창조하여야 하는가가 관심의 초점”이라고 하면서, “건축물이 서있는 지방의 재료를 써서 건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건축에 대한 아념과 사상”이란 논고를 통하여 “건축주의 이윤을 추구하는데 휩쓸리면 사용자의 편익은 무시되기 쉬운 것이다. 건축이 대다수의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올바른 건축가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쉽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면서 건축사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온돌을 폐지하고 서양처럼 입식으로 해야 한다’는 당시 건축계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는데, 지금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온돌 돌풍이 불고 있는 것에서 선견지명을 볼 수 있다.



광주, 전남, 제주에 제주교육대학 등 작품다수
임영배, 박한규 김문한 이수곤교수 등이 제자
뒷산의 경사와 반대되는 지붕물매를 가진 덩어리(중앙도서관)를 지붕 위에 얹어 놓은 제주교육대학(1971)이나 건물의 일부를 제주석으로 마감한 남제주군청사(1964) 등 그의 작품은 “민족성, 지역성, 산업수준에 맞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방식과 함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의 건축철학과 철저히 부합되고 있다.
김홍식 교수는 그의 부친 김한섭 교수의 작가론을 쓰면서 “인간, 건축 그리고 반성”이란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인간론에서, ‘옳다고 생각되면 고집을 꺾지 않으며, 돈에 초월한 분으로서, 도청 근무 시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중학동창들에게 맞아서 고막이 터진 적이 있다’면서, ‘노동의 대가 이외에는 절대로 이윤을 취하지 않는 분’으로 적고 있다. 그러면서 박길용사무소에 있을 때부터 ‘진실된 건축은 우리(한국)에 대한 명확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서 ‘내가 이런 영향으로 한국건축사를 전공하게 됐는지 모른다’고 쓰고 있다.
남동생 제일엔지니어링 전 대표이사 여동생 용미 한 불 건축사
아들호민 영 AA스쿨 졸업, 딸 호연 실내 디자인 명지전문대 교수
교육자이며 건축가인 김한섭은 4남 1녀를 두었다. 그중 큰아들 김홍식 교수와 현재 (주)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이사인 딸 김용미 건축사가 건축을 업으로 대를 잇고 있으며, 둘째 아들 원식은 고려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구조기술사로서 (주)제일엔지니어링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따님인 김용미 건축사는 서울대 건축과와 동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 국립파리7대학에서 5년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파리 벨빌 건축대학을 졸업한 후 프랑스 국가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저서로는 건축공간박물관(발언출판사, 1984년)이 있으며, 2002년 건축가협회상, 목재건축대상 2006년 우수상, 2008년 대상을 받은 바 있으며, 작년에는 남산국악당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중앙건설심의위원, 서울시 건축위원, 문광부 역사 문화마을가꾸기사업 전문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홍식 교수는 자녀 셋을 두고 있는데, 아들 호민은 서울대 건축학과와 영국 AA School을 졸업한 영국건축사로, 런던과 서울에 폴리머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 호비는 토목전공으로 현재 미국 퍼듀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고 막내딸 호연은 이화여대와 미국 AAU 대학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하고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로 있다.
종형 상식과 3종 석윤가도 건축사 집안
상식생질은 연세대교수, 현신건축 이윤석 대표도 인척
이렇듯 3대에 걸친 건축가 집안은 방계가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김한섭 교수의 친조카 김상식은 김홍식교수보다 먼저 홍익대를 졸업하고, 그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김홍식교수가 학교로 들어가면서 어려웠던 금성건축을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지금은 4촌 김용미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4촌간의 운영에 불편함은 없는가라고 물었더니 모두 “진정 좋은 점만 있다”고 했다. 그는 건축사 외에 지정문화재 실측설계기술자 자격을 갖고 있으며, 2회에 걸친 한국건축가협회상과 광주시청으로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04)을 수상하였고 동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김상식 건축사의 생질인 임호균은 홍익대 건축과를 거쳐, 프랑스 파리 에꼴 까몽도에서 실내건축을 공부한 후 홍익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연세대학교 주거환경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감한섭 교수의 재종질 김석윤 건축사는 홍익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제주도에서 김석윤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대한건축사협회 제주건축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제주지역 건축문화 발전에 많은 헌신을 해오고 있다. 그의 아들 김도훈도 국민대건축과 졸업 후 도미하여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 미국 Gruen Santom건축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김석윤 건축사의 생질 강문종 건축사도 연세대건축과를 졸업하고 현재 제주에서 연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고 이 외에도 김한섭 교수의 종질녀 아들, 이윤석 건축사는 한양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현신건축사사무소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동고조(同高祖) 8촌 한마당에서 난다’는 속담처럼, 옛날 같으면 한집에서 자랄 8촌 이내 방계까지 합치면, 김홍식가는 건축사만 9명에 그 자격도 한국, 미국, 프랑스, 영국 등 4개국에 달한다. 또한 3명의 교수를 배출했다. 가히 한국제일의 건축명가가 아닐 수 없다.
금성건축 90며명 직원, 건축문화대상 2회 수상
창립자 정신 계승, 3세는 모두 독립사무소 개설
취재차 찾은 방배동 금성건축 사옥은 건축인들을 위한 열린 문화공간을 만드느라 지하층이 공사 중이었다. 금성건축을 책임지고 있는 김상식과 김용미 건축사에게 건축철학을 묻자, ‘지역성과 친환경성, 사회적 현실에 맞는 건축’ 등, 김한섭 교수의 건축철학 그대로였다. 김한섭 교수의 철학을 아들인 김홍식 교수가 민족건축론으로 체계화했다면, 조카이며 제자인 김상식과 딸 김용미는 작품에 적용하여 실천하고 있었다. 때마침 제주에서 올라온 김석윤 건축사도 마찬가지. 숙질간보다 스승과 제자편이 더 맞다고 한다. 같이 있던 3세들에게 물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직계 3세인 김호민에게 “그렇다면 왜 금성에서 있지 않고 따로 나가 있는가?”란 질문에 “아무래도 선대(아버지, 큰아버지, 고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새로운 건축영역을 개척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금성건축은 김상식대표와 김홍식교수의 영향 탓인지 전통건축군에 기반을 둔 작품과 일반작품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전자는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수상작 남산국악당 외에도 백제역사민속박물관, 황룡사지 전시관, 전통야생차 문화 체험관, 전통한옥형 숙박단지, 신한옥 디자인 공모 등인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현상에서 당선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산국악당 보다 먼저 대통령상을 수상한 광주시청사를 비롯 전남도청사, 용인소방검정공사, 울산테크노파크, 남해유배문학관, 양주회암사지 전시관, 제주의과전문대학원 등 일반 건축군에서도 특출한 현상당선작이 많았다.
금성건축의 직원은 90여명, 결코 작은 회사가 아니다. 더 키워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창업자인 김한섭 교수는 설계사무소는 학교의 연장이다. 따라서 도제교육이 이뤄져야하며, 사무소의 존재이유가 작품에 있지 돈벌이 있지 않다.”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아무래도 이 정도 규모를 벗어나면 사무소가 작품보다는 사업에 치중하게 될 것이라고 김상식 대표가 말했다. 또한 대를 이은 금성건축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면서 창업자를 욕보이면 안 되기에 처신을 신중히 한다고 하였다. 김용미 대표는 “대를 이어하다 보니 일하기가 편하다면서 건축은 대를 이어 해 볼만하다”하였다. 김홍식 교수는 오래하니까 세무조사도 면제되고 기술진들의 인과관계도 좋게 지속된다면서, 전문직업인에 대한 상속세가 완화되어야 대를 이을 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지금 금성건축에는 3세들이 단 한명도 없다. 김상식 대표는 “김용미 대표가 자신과 14년이나 나이차가 있어 자신은 후계구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서도, 굳이 말한다면 사무소의 정신과 전통을 키워갈 수 있는 인물본위이지 피는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어디에 있든 3세들이 2세들 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램이라면서, 피에 흐르는 전통을 바탕으로 또 다른 자기세계를 키워갈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