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발주사업, 건축물 품질 저하와 설계인력 확보 곤란 등 전형적인 시장실패 모습 보여

해외사례와 비교해도 건축 설계비 법이 정한 설계비용에 훨씬 못 미쳐

시장실패에 따른 정부의 직·간접적 지원과 제도적 보호 장치 있어야…건축사협회 “공공재 성격 강한 산업별 특성 세심히 살피고, 개별법 입법취지 등 깊이 있는 통찰 필요”

지난 2월 10일 국토교통부가 행정예고한 ‘한국건축규정 공고안 개정안’에 따르면 △건축허가 시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법령 137개 △의제처리 법령 29개 △심의·인증 및 평가를 위해 추가 확인이 필요한 법령은 무려 237개에 달한다. 현행보다 확인해야 할 법령이 6개 늘었다.

실제 건축물 하나를 지으려면 심의 또는 인증 절차만 많게는 40여 개를 받아야 하는 게 국내 현실이다. ‘건축허가 및 심의절차 선진화 방안 연구(2019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따르면, 공공건축(관공서) 32건, 초고층 주상복합은 종합 36건의 심의·인증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입장에서는 건축물이 공공재적 성격이 강한 공공자산이기 때문에 공익적 측면에서 서비스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 각종 규제를 가하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현장의 건축사들은 수도 없는 심의와 규제, 제한이 들어오다 보니 “건축을 하는 건지, 행정을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고 토로한다.

현재 민간발주사업의 경우 최저가 낙찰 관행에 따라 덤핑수임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한 건축물의 품질 저하와 설계인력의 확보가 곤란한 지경까지 내몰려 전형적인 시장 실패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체 건축시장 81%를 차지하는 민간 건축설계비는 공공 대비 20%(세움터 통계자료<2015∼2019년>)에 불과해 절대적인 건축주와 가격우위 시장에서 제대로 된 설계품질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위한 서비스 제공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해보면, 국내 건축시장은 저가경쟁으로 인한 기본적인 건축 설계비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재적 성격 탓에 각종 규제와 해야 할 일은 시간이 갈수록 쌓이는 메커니즘이 시장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외와 비교하더라도 국내 건축 설계비는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된다. 서울시 자료에 의하면, 국내 건축 설계비는 해외 설계단계 대가의 약 70∼80%에 그치며, 건축사의 업무범위를 설계(기획업무, 계획설계, 중간설계, 실시설계)에서 공사단계(설계의도 구현)까지 확대할 경우 해외 대비 절반 이하인 45∼50% 수준으로 뚝 떨어진다.

(자료=서울특별시)
(자료=서울특별시)

과거 시장경제 경쟁정책이 강조된 데 따른 부작용(시장실패)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개선이 일부 행해지기도 했다. 부실설계로 인한 건축물의 안전우려 등 모든 문제는 낮은 업무대가에서 시작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2017년 ‘공공대가기준 의무화’ 건축사법 개정이 이뤄졌는데, 당시 국회는 심사보고서를 통해 “공공대가기준이 권고사항에 불과하여, 국가·지자체 및 공공기관 등이 공공대가기준보다 지나치게 낮은 대가를 책정하거나 업무 수주자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발주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부실설계와 부실감리로 이어져 공공건축물의 품질과 안전성을 저해할 수 있다”며 “건축사의 건전한 육성, 건축설계·감리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런 국회 심사 과정에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공공대가기준이 민간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쳐 자율적 가격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시장 실패가 분명할 정도로 열악한 건축시장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설계 민간대가 기준을 다시 만들어 제정하는 게 시급히 필요하다”고 현장의 건축사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선 공정거래법과의 충돌을 피해야 하는 것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시장경제 체제에서 정부의 개입은 몇 가지 측면에서 정당화되는 게 일반적이다. 공공재, 자연독점, 외부효과, 정보 비대칭성 등의 이유로 발생한 시장실패가 그것인데, 공정거래법에서도 시장경제에서 경쟁 원리에만 의존할 경우 오히려 경제의 자연스러운 순환고리를 경색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에 시장 실패가 예상되거나 공공재 성격이 강한 산업분야에는 거시적 차원에서 공정거래법 적용의 예외를 인정하거나 유보 또는 제외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산업 정책 소관 부처의 전문적 판단을 존중하고 규제의 우선관할권을 인정함으로써 경쟁 정책과 산업 정책의 조화를 꾀한다는 취지에서다.

(자료=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건축사협회 법제정책처는 “공공재 성격이 강한 산업분야의 시장실패(왜곡)에 대응하고 불균형 축소에 나서는 것은 시장을 방해하는 행위가 아니다. 시장실패에 따른 정부의 직·간접적 지원과 제도적 보호 장치가 있어야 한다”며 “경쟁 주창 활동이나 법령의 해석과 적용 역시 법치주의 기본 원칙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공정거래법 적용의 제외 역시 공정거래법의 시각과 잣대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전체 법체계와 조화되도록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공공재로서의 산업별 특성에 대한 이해와 개별법의 입법취지, 해당 산업 내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거래가 이루어지는지’ 등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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