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작, 바지작’서두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원두를 갈아 따뜻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움켜쥐고, 전화벨도 멈춰버린 고요함이 흐르는 나만의 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어깨를 의자 깊숙이 기대며 비로소 느끼는 안도감이란....

갓 스물에 건축이라는 학문을 전공으로 선택한 후, 한 번의 외도도 생각한 적 없이 27년이란 세월을, 한마디로 ‘건축에 올인’하며 살아온 오늘의 나에게, 얼마 전 전혀 엉뚱한 호칭이 붙기 시작했다. 건축사 김용각이 아닌 ‘쌍둥이아빠 김용각씨’, ‘동화구연가 김용각씨’ 등이 바로 그것이다.

15년 전 지금의 아내와 함께 웨딩마치를 울리고 허니문베이비로 갖게 된 두 아이로 인해 어리벙벙하게 지낸 신혼의 시절, 신혼의 달콤함이란 말은 너무도 무색하게 IMF의 회오리에 휘말려 사라지고, 두 아이의 분유값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던 그 때,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감당할 재간도 없어 몸으로 떼우겠다는 심산으로 시작한 눈높이 교육의 시작이 그 호칭의 시발점이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재주나 계획은 없었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며 아이들의 눈높이로 나의 시선을 내려준 것이 그 당시엔 전부였다. 아이들이 유독 책을 좋아해 매일같이 책을 읽어주었다. 이왕이면 실감나는 이야기처럼 들려주기 위해 여러 가지 소리를 흉내 내다가, 후에 전국아버지동화구연대회에 출전해 입상하게 되었고, 아버지 동화구연가가 되었다. 지방에 있는 관계로 활발한 활동은 못하고 지역대회의 심사와 봉사활동 때 가끔 실력 발휘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지금은 이미 많이 녹슬어 있음을 고백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학습에 참여하게 되었고, 매일 아침 아이들과 게임을 가장한 수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간단한 연산문제를 풀며 시간을 재어주고, 동기유발을 위해 학습량을 그래프로 그려주고 조그만 선물도 준비했다.

하지만 점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나에게는 더 많은 지식과 준비가 필요했고, 어설픈 수업에 아이들도 슬슬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마침내 질풍노도의 시기, 중딩이 된 두 아이는 예상보다 훨씬 강도가 쎈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 심하게 출렁거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신문에서 교육칼럼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 시간을 통해 지난시간을 뒤돌아보며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와 나의 교육법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의견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기사 제목이 ‘동화구연가 김용각씨의 자녀교육법’이다. 너무 쑥쓰러워 기자에게 건축사라는 호칭을 사용해 주길 원했으나 단번에 거절당했다. 쩝~!

난, 건축에도 참 열심이었는데, 27년간의 전공은 물론 15년 동안 꾸준히 해 온 대학 강의, 5년째 지역건축사회 운영위원장의 역할, 올 해에 맡은 대전건축문화제 추진단장까지... 정말 건축사로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정작 방송이나 언론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다루어지면서 내가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 같은 의구심이 생기며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삶이 가정과 사회에서 필요로 한 곳에 골고루 사용되고 있음에 감사하기도 했다. 쓰임 받는 것, 이왕이면 요긴하게 쓰임 받는 그런 삶이 된다면 까짓것 건축사 김용각이 아니어도 기쁘게 살아갈련다. 인생은 짧지만 참 변화무쌍하고 드라마틱한 나만의 역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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