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의 설계를 꾸준히 해오다 보니 경력을 인정받아 이제는 경쟁설계의 심사에 초청받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사실 심사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공모에 참여 하는 건축사의 정성, 진심, 경제적 부담을 모르는 바 아닌데, 나의 어쭙잖은 판단으로 누군가의 가능성을 예단하여 박탈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경험을 공공 에게 돌려주는 사회참여의 한 방식이라 생각하여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전문분야의 설계가 아니라면 가급적 참여하려는 편이다.
이렇게 심사의 경험이 쌓이다 보니 심사는 심사위원으로서 개인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당선작을 선정하는 프로세스로서 의사결정의 방식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어떤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생각 이다. 프로젝트와 심사위원, 공모 참여자의 구성에 따라 그때 마다 적절한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공모를 둘러싼 건축계의 부조리를 의제로 올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심사의 의결 방식을 나열해서 나중에 참고할 수 있는 논평으로 활용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1. 표결 : 가장 전통적이며 무난한 의사결정 방식은 표결이다. 응모작이 다수라면 한 번의 표결을 통해 의견수렴이 어렵다고 보아, 단계적 표결을 통해 대상을 좁혀 나가는 결선투표 제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 경우 심사위원이 짝수라면 표결 결 과가 동수로 두 안이 경쟁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다수결로 당선작을 가리는 것이 심사위원 간의 의견을 공평하게 평가에 반영하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안에 대한 평가가 팽팽하게 경쟁할 때는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당선안의 적정성에 대해 이견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기도 해서 불편한 부분도 없지 않다.
2. 평가점수제 : 주로 턴키 등의 기술심사에서 영향을 받아 공공부문의 공모에서 지자체의 자체 기준으로 정해져 공고된다. 정확하고 공정한 심사를 위한 의도이기는 하지만, 정성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건축설계에서는 부여되는 임의적인 점수라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고 오히려 심사위원마다의 기준 에 따라 평가의 불균형이 생기기도 한다.
평가에 대한 숫자의 폭을 넓게 주는 위원의 경우 같은 정도의 평가로도 숫자의 폭 이 적은 심사위원보다 사실상 표결권을 더 갖게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소수의 평가의견이 다수의 평가의견을 능가하는 불 공정 논란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급제도 제시된다. 수우미양가 등으로 평가의 등급을 정해 각각에 점수를 강 제로 차등하여 부여하는 방식이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당선작 을 선정하는 것인데, 분산된 점수를 모아서 하나의 우수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적당한지 의문이 들기는 하다. 그럼에도 여러 분야의 기술적인 평가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여러 작품이 경쟁할 때는 효과적일 수 있다.
3. 토론과 만장일치제 :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평가는 심사 위원들이 의견을 나눠가며 가장 적당한 설계안을 찾아나가는 방식일 수는 있다. 물론 표결이던 점수제이던 심사위원 간의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기 위해, 또는 평가의 이유를 투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토론의 과정이 포함되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이나 환경이 토론하기에 마땅하지 않을 때도 있고, 토론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심사위원에 따라 다른 때도 있기 때문이다. 토론 이 이상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전제로, 심사현장에서 심사위 원 간의 만장일치로 당선안을 선정하기로 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만장일치는 심사위원장의 주도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이견 없는 당선안을 통해 좀 더 건강한 영향력으로 당선된 건축사를 존중하는 방식이 될 수 있기는 하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를텐데, 만장일치라 는 것이 결과적으로 가능한 것이지 먼저 약속하고 만장일치로 합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잘못하면 다 수, 혹은 발언권이 강한 일부가 그렇지 못한 소수를 굴복시키는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기술평가와 페널티 : 건축설계의 심사는 한정된 시간에 제한된 정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로 건축의 개념과 계획 각론적인 측면에서 평가된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인 사항이 검토되지 못한 채 불합리한 안이 선정되어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주로 법규와 공사비에 관한 사항이 그렇다. 또한 공모지침으로 주어진 내용을 어겼을 경우 공정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주로 면적과 제출물 형식에 관한 사항이 그렇다. 이러한 문제가 심사에서 검토되기 힘들다 보니, 평가 이전에 발주자 측에서 기술평가를 통해 확인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분명하게 결격의 사유나 감점의 사유로 공모 당시 공고된 사 항은 이 단계에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페널티의 판단이 모호한 사항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사항은 심사위원 에게 보고하여 평가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경 우 심사위원 간의 합의를 통하여 평가에 반영 여부를 결정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계획안의 개념과 주요 아이디어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는 계획설계 단계의 고유한 한계로 생각하여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제출물의 형식 제한이 과도하여 계획안과 무관한 악의 없는 위반으로 좋은 안 이 불이익을 받을 때가 가장 아쉽다.
5. 심사위원장 : 앞서 얘기한 대로 프로젝트의 경우에 따라 심사의 변수가 다양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심사위원 간의 의견을 조율하며 의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심사위원장의 역할은 중요하다. 심사위원장은 현장에서 추대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다양한 변수를 고려할 수 있는 경험과, 심사위원 모두가 의견 을 따를 수 있는 연륜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심사위원 명단만 보면 거의 정해져 있다고 봐도 된다.
추대되는 당사자도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 한두 번 정도 거절하다 수용하기 마련이다. 심사위원장의 성향에 따 라 의결방식은 물론이고 드물게는 안을 평가하는 시각에 영향 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 영향력을 좀 더 객관화시키기 위해 심사위원장의 표결권을 제한하기도 한다.
6. 프레젠테이션 : 계획안은 건축사가 직접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그래서 상황이 되는대로 프레젠테이션의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이 기회가 항상 이상적으로 건축사에게 좋은 기회가 되지는 않는다. 건축사라면 감동적인 PT를 해 내서, 사전 검토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심사 위원의 시각을 되돌리기를 꿈꾸지만, 현실에서 그런 스티브 잡스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질의응답을 통해 이해가 잘 안된 내용이나 건축사의 태도를 확인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데, 이게 또 다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질의응답으로 끝내야 하 는 기회를 잘 못 이해해 심사위원이 공모참여자를 야단치거나 가르치려 드는 민망한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 다른 평가위원 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의도로 계획안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질의를 한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인 피 평가자가 공격적인 심의위원에게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피력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7. 순위평가 : 설계공모는 당선안만 기회를 갖는 승자독식 의 가혹한 방식일 수밖에 없다. 한 땅에 두 건물을 지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당선은 안 되었지만 좋은 계획안 에 대해서는 피드백이 되는 것이 여러 의미에서 필요하다. 참여한 건축사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고, 건축문화의 측면에서 당대의 관점을 폭넓게 기록으로 남기는 의미도 있어서다. 그리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많은 건축사에게 비용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전에 공고되어 당선안 이외 의 계획안에도 순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근본적으로 건축 에는 등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순위평가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지만, 앞서 얘기한 여러 이유로 이해한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심사하는 입장에서도 당선되지 못해 아쉬 운 계획안에 대해 그나마 위안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