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사무소를 개설한지 일 년이 되지 않는 신생 사무소의 건축사로서 가장 어려운 일은 계약수주까지 이어지는 설계비를 제안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이 고민 앞에 서본 경험이야 많지 않지만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지켜본바 설계비는 의뢰인의 주된 관심사이자 계약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작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건축설계는 의뢰인이 여타 제조품처럼 결과물이나 구성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약서에 기반을 둔 신뢰로 관계를 맺고 또 전문성으로 채워진 설계프로세스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기에 쉽게 비교 가능한 설계비 자체가 계약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프로젝트 성격에 부합하는 적정설계와 이에 합당한 적정설계비 책정은 중요한 부분이 된다. 하지만 공공건축과는 달리 민간건축 설계비 산정의 현실적 가이드라인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적절한 설계비 산정과 대가를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얼마 전 이 현실의 어려움을 깊이 자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인을 통해 단독주택 설계 문의가 있었다. 의뢰인은 지인의 친구로 필자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다. 의뢰인은 지방 소도시의 개발행위허가가 난 땅을 기존 매수인의 권리를 양도양수 받아 매매 완료했으며 그 내용 가운데에는 이미 계약된 건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계획설계를 염두에 둔 소통과정 중 기존 건축사와 계약된 설계비를 알게 되었는데, 소위 말하는 허가방의 인허가 비용을 약간 웃도는 금액이었다. 계약금이 인허가 비용에 불과했기에 실시설계 단계까지 설계업무영역을 확장하여 제안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 즈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패시브 건축 실무교육도 받아 둔 터였기에 건강한 주택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포부가 생겼다. 의뢰인과의 대지 답사 일정을 앞두고 제안서와 함께 공공발주사업 업무대가 산정요율을 참고하여 계획/중간/실시 설계 단계의 요율을 나누어 설계비 산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협의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대지 답사 후 기존 건축사와 계약한 설계비가 인허가 비용 외에 설계업무 전 과정을 포함한 금액임을 알게 되었다. 의뢰인은 이 설계비로 만족할 만한 설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때문에 계획설계 단계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의뢰인은 계획단계는 필자와의 별도 작업을 통해 채우고 직영공사로 지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계획설계비는 기존 건축사와 계약한 설계비를 기준한 요율 정도로 제시하였다. 공공발주 사업 업무대가 요율로 산정한 계획설계비에서 민간건축임을 감안하여 제시한 금액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것은 물론 기존 건축사의 인허가 비용 수준의 설계비가 요율의 기준이 되어 가이드라인이 순식간에 하향 조정이 되어버렸다.
더불어 계획설계 단계를 강화한다 할지라도 부족한 설계비로 인해 설계의도가 일관되게 중간 및 실시설계 단계로 이어질지의 여부와, 직영공사로 설계와 시공의 간극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지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에 대해 조언하였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이 배경은 의뢰인이 몇 해 전 단독주택을 짓기 위해 이름이 알려진 건축사에게 적지 않은 설계비를 지불하고도 자신의 스케치와 유사한 도면을 한참이나 지나 받아들게 된 경험과 무관치 않고, 이웃한 대지에 직접 집을 짓고 사는 건설관계자를 현장소장으로 두고 직영공사를 하게 된 나름의 럭키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일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바가 있다. 의뢰인에 대한 서운함도, 기존 건축사에 대한 비난도 아니다. 의뢰인은 여러 경험 끝에 가장 경제적이며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수 있다. 다만 그 선택들 사이 현실적 간극이 얼마나 채워지느냐의 숙제가 남아 있다. 기존 건축사의 설계비도 자율시장경제 속 경쟁관계 안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을 수 있다고 애써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다만 이러한 상황의 논리 안에서 지어지는 집의 온전성과 건축사의 전문성 그리고 의뢰인의 권리가 지켜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건설비 상승으로 건축물은 갈수록 고가의 제조물이 되고 있고, 기후위기와 사회환경의 변화는 각종 법규와 건물안전 및 성능의 강화로 이어져 그 어느 때 보다도 건축사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각종 법규 강화와 관리감독 영역확장 등의 규제 강화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민간발주자와 건축사가 공유하는 설계비의 가이드라인이다. 이것이 마련되어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건축사의 전문성이 발현되는 설계단계가 보장되고, 의뢰인도 합당한 설계비 지불로 권리를 취할 수 있는 건강한 민간건축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문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설계비 책정을 위해 쏟던 에너지를, 합의된 설계비를 기반으로 하여 적정설계를 위한 생산적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을 반복하며 ‘설계비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가?’ 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