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암사 3층석탑과 대웅전

이웃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한다면, 중국은 전탑, 우리는 석탑의 나라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목탑과 전탑의 기술을 배워왔으나, 전탑은 기본적으로 전돌을 굽는 기술이 미숙하여 처음에는 돌을 전(벽돌)처럼 다듬어서 썼다.

▲ 분황사 모전석탑

그러나 백제에서는 무령왕릉의 경우에서처럼 전돌을 굽는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에는 또 하나의 전분-무덤이 남아 있다) 기술이 더 발달된 돌로 목탑을 모사하여 만든다. 목탑은 짓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매년 유지보수비가 만만치 않았고 전탑은 목탑의 우아하고 날씬한 선 맛을 나타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특유의 석탑이 탄생하게 되었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석탑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통일신라기의 3층 석탑이다. 2층의 뼈대식 기단 위에 3층의 지붕을 올리고 지붕받침을 5단으로 한 형태를 ‘전형’이라고 한다. 기단의 숫자가 작아지거나 지붕받침의 단이 적어지면 제작 시기가 떨어진다고 판단한다. 물론 고려 중기까지 내려오면 몸통에 귀기둥까지도 생략된다. 그러나 그 전형은 경주 감은사에서 시작해서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된 것으로, 이 모두가 유가학파의 철학을 반영한다.

우리나라 불교에는 율, 삼론, 유가, 화엄, 선, 천태와 밀교 등 수 많은 종파가 전래되었지만, 이 가운데 유가학파가 고려 중기까지도 위세를 떨쳤으며 통일신라 말 이후에는 법상종으로 발전해 갔다. ‘유가학’이란 소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요즘 인도에서는 요가라고 하며, 뜻으로 번역하면 ‘유식(唯識)’이라고 한다. 이것은 북인도의 무착이 세우고 현장이 배워 온 것을, 신라의 원측(613∼696)이 유식소초를 지어 전수 받았다. 이들은 인간과 세상 만물의 생멸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었다.

반야심경에 색(色)(6식(識)에 의해 감지되는 것)은 곧 공(空/빈 것)이요, 빈 것은 곧 색(色/감지되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인간의 본체는 원래 빈 것인데 어떻게 윤회할 주체가 없이 윤회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다. 즉 6식(인식) 아래에는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7식 가치기준)의 세계가 있고 또 그 아래에는 무의식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8식(유전자)이 있어서, 이것이 우리를 윤회케 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세상이 완벽한 유크리트 기하학의 세계로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이 계획한 모든 사찰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졌다. 경주 황룡사나 불국사, 익산 미륵사지를 분석하면 모두 콤파스의 동그라미 안에 맞아 떨어진다.

이것을 일인들은 木割(기와리)에 대(對)해 ‘지할(地割)’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유크리트 기하학의 세계를 부정하는 화엄종의 유행과 함께 차츰 사라진다.

불교에서는 불, 법, 승을 삼보라고 해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불은 부처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다른 이를 인도하는 교주를 말하며 법은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설한 가르침이고, 승은 그 법을 따라 수행하는 제자 집단으로서 이들이 없으면 불법이 전달되지 못 할 것이다. 따라서 고대 절에서는 대문을 들어서면 제일 앞에 부처를 상징하는 탑이 서고 다음에 법을 상징하는 금당이 놓이며 맨 뒤쪽에 승려를 가르치는 강당이 배치된다. 그러나 갑자기 유가학파들은 탑을 2개로 갈라 양쪽에 세우고 법당을 절의 중심 자리에 앉힌다.

부족국가를 합쳐서 통일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각 부족의 서로 다른 가치기준을 통일할 하나의 똑똑하고 무서운 전륜성왕이 요구된다. 여기에 걸맞는 사람이 인도의 아쇼카(99명의 이복동생을 모두 죽이고 인도를 통일한) 왕이고, 우리의 경우 고구려 소수림왕, 백제 성왕, 신라 진흥왕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고 난 이후에는 무소불위의 독재자 왕보다는 법치가 요구된다. 그래서 탑을 갈라 세워서 정 중앙에 법을 상징하는 금당이 드러나도록 계획한다. 대신 석탑은 3층으로 만들어 3성(性)을 상징한다던가, 5급으로 지붕을 받쳐서 유가학파의 만유 분류법인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상징하는 등, 숫자에 대단히 집착한다.

어쩌든 우리는 유가학파(법상종)가 대단히 표준적인 상징성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똑같은 형태의 통일신라기 3층 석탑이 도처에 널려 있게 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똑같은 형식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화엄종을 계승한 선종의 역할이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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