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명상입니다
- 유하
은행잎에 그대가 물들었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거리를 떠나갑니다
온 산에도 그대가 물들어갑니다
산을 내려온 그대 물든 걸음
사뿐 강물이 받아줍니다
강물 위에 그대 떠내려갑니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그대 떠내려갑니다
지금껏 난 흘러가는
그대 붙잡으려 했습니다
지친 매미 울음처럼 붙잡으려 했습니다
아아 온 천지에
그대 수없이 물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대 떠내려가는 모습
내게 눈부심이었습니다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행잎 하나에도
그대 얼굴 물드는 시간입니다
은행나무처럼 나 이제
그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나를 떠나갑니다
떠나는 그대 눈부신 명상입니다
잔잔한 강물 같은 명상입니다
- 유하 시집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문학과지성사 / 1991
올해는 가을 없이 바로 겨울로 들어선 느낌이지만 그래도 물드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면 이미 지나가 버렸는지도 모르는 가을에 대한 상념에 빠지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행나무가 아직도 푸른 건 좀 낯선 계절이긴 하다. 가을은 언제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고 열매들이 독한 냄새를 피우며 가로에 뒹구는 때아니던가? 계절이 지나가듯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본다. 그게 가을이라면 ‘눈부신 명상’으로 물드는 시간일 것이다.
함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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