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봉 마이다스아이티 국내사업그룹장
김기봉 마이다스아이티 국내사업그룹장

최근 도면 작성 프로그램인 Auto CAD가 독점적인 위치를 내세워 일방적인 가격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로 인해 관계자들이 큰 불만과 경제적인 부담을 호소한다. 하지만, 제작사는 그런 시장의 반응에도 구 버전의 서비스 중지와 불법 사용 단속을 통해 변경된 정책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모양새다.
건축사들에게 도면 프로그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설계 노하우와 철학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고객과 소통하는 도구이다. 고생스럽게 일한 가치를 증명하고 대가를 받는 성과품의 매개체인 까닭에 앞으로 건축사들에게 어떤 선택지가 남아 있는지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그램 본질은 ‘통(通)과 쾌(快)’ 
그 옛날 셀 수 없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고단한 작업을, 이제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마음껏 편집하며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수 없는 작도의 고통에서 벗어나 생산성이 높아져 몇 날 며칠 걸리던 일을 혼자서 수일 내에 완성할 수 있게 됐다. 즉 캐드 프로그램이 주는 가치는 건재하며, 도면을 그리는 도구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묵은 쾌(快)와 무뎌진 통(通)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솔루션’이다. 그렇다면 캐드는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솔루션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캐드가 주는 효용은 초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손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당연히 효용이 있겠지만, 사용자가 매번 똑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은 여전하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나의 업무 특성에 맞춰 특화·반복해야 되는 것들은 가능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도면을 그리는 도구로만 바라보는 제작사와 그 도구에 나의 업무를 맞추며 길들여져야만 하는 환경에서는 우리의 通이 해소되길 기대하기보다는 通에 무뎌져야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 자명하다. 이제 캐드를 도구보다는 우리의 업무를 종결짓는 솔루션의 프레임으로 접근하고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답은 현장에 있다
프로그램이 솔루션이 되기 위해서 제작사는 사람을 지향하고, 제품은 사용자의 업무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건설 분야에서 BIM이 큰 범위에서 그에 해당될 듯싶다. BIM이 건축 설계에서 시공 후 유지관리까지 각각의 업무 프로세스에서 사람들이 해주어야 할 역할을 디지털 성과물로 모두 담아 이어가고 있어서다. 캐드가 솔루션이 되기 위해서는 건축사들에게 필요한 전용의 객체와 기능들이 건축사 업무를 진행하는 요소요소에 전용화 되어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품의 개발과정부터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 과거에는 거의 완전한 제품을 제작사가 제공하고 건축사들이 제공된 기능을 알아서 잘 활용해야 했다면, 최근 출시되는 솔루션은 제작사와 사용자 간의 실시간 소통을 통해 실무에 가장 효용성이 높은 기능들을 하나씩 채워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국내 건축사들에게 진짜 효용이 있는 캐드가 되기 위해선 국내 토종 프로그램 제작사만이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파워를 감안했을 때 이제는 우리 건축사만을 위한 캐드 솔루션을 확보하고 기술력과 경쟁력을 확보하여야 할 것이다.

길들여짐의 대가(代價)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는 길들여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장미꽃에 길들여졌음을 깨닫고 되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려 죽음을 선택한다. 반면 사막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기를 선택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필자는 ‘길들여지다’와 ‘익숙해지다’는 사전적으로 비슷하나 의미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길들여지게 되면 다른 방법이 있어도 생각을 못 하게 된다. 반면에 익숙해지는 것은 여러 방법을 고심하고 나의 선택과 노력이 포함될 수 있다.

현재 AutoCAD에 길들여짐에 대한 결과로 많은 이들이 감정적, 경제적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지금 건축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건축사를 생각하는 프로그램 제작사와 직접 소통하면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솔루션이다. 10여 년간 현업에 몸담았던 실무자로서 그리고 국내 토종 IT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설계 소프트웨어의 국산화와 세계 표준으로 만들겠다는 열정을 담아 기고하며, 건축사분들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의 사막 여우가 되는 현명한 선택을 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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