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비대면 건축서비스를 홍보하며 ‘착한 건축가’란 표현을 쓴 광고를 봤다. 이 광고에서의 착한 건축가란 아마도 저렴한 비용으로 받아보는 설계계획안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건축적 기술을 상품화하지만, 난 이 광고에서 건축사의 윤리와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 전 대학에서 ‘건축사의 윤리’를 주제로 특강수업을 했다. 수업에 앞서 건축사의 윤리선언서를 먼저 읽고 수업을 진행했다. 내용 중 “건축사는 전문지식과 기술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건축문화 창달과 건축교육 발전에 기여한다.
또한 공공사회 발전에 기여하며 법규를 준수하고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여 업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아마도 2000년 열린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주제가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미학적이면서 윤리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겠지만, 조금 덜 미학적이지만 사회적 공공성에 부합한 윤리를 강조한 듯하다.
한편 우리네들(건축사)의 그늘 또한 존재한다. 건폐율, 용적률, 세대수 늘리기 등등. 누가 잘하나 겨루는 ‘용적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 이런 것에 재주가 없어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그저 건축주가 사무실을 찾아오면 미팅을 하고, ‘신뢰와 존중’을 보이는 분들과만 일을 하고 있다.
이건 어떠한가. 강의를 하면서 새내기 건축과 대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해 준 인용구다.
“scale 1 / 100 의 스케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건축사가 공간적·구조적·미학적 기교를 부릴 수 있는 안정적인 크기라 배웠다. 1;100척도는 ‘윤리적 치수’라고 가정한다면, 1명의 건축사 대 100명의 다른 사람들의 만남을 의미할 수 있다. 아마도 100명의 다른 사람에 대한 1명의 건축사의 윤리적 책임감을 의미하기 때문일지도….”
어떤 전문분야에서나 그에 따른 고유한 직업윤리가 있다. 구체적인 윤리의 내용은 각 직업마다 다르겠지만, 조직 내에서의 고유하고 특별한 윤리와 책임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건축계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건축계 모두의 문제이다. 너의 문제는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는 너의 문제가 된다.
마지막 글을 정리하면서 좋아하는 글 하나를 ‘읊조려 본다’
“우리는 땅에 얽매여 있지만 비전을 가지고
환경 의식과 윤리적 상상력으로 바탕으로
그것의 공간적인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