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나는 수학과 미술과 노래 등에 다양하게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만약 수학에만 재능이 있었더라면 수학과를, 미술에만 재능이 있었더라면 미대를, 노래에만 재능이 있었더라면 성악과를 지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당시에 취직이 가장 잘 되는 학과 쪽을 권장하셨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이 다양한 재능을 한꺼번에(?)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취직이 가장 잘되는 학과인 건축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입학하고자한 대학은 공학계열 모집이었으므로 내가 원하는 과에 꼭 가고 싶다면 대학 1학년 학점이 좋아야 했다. 긴장된 1학년을 보낸 후에 나는 내가 지망한 대로 건축공학과에 가게 되었다.(대학 1학년을 좀 편하게 지냈더라면 운 좋게도(?) 다른 학과에 들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졸업 후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후에 대기업인 H사에 입사했고 수학 학점이 좋다는 이유로 구조디자인 파트에 배치됐다. 그런데 건축사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되자마자 운 좋게도 건축사시험에 합격했다. 1989년도에는 250명 정도 뽑는 건축사 합격자 명단이 일간 신문에도 났다. 집안에 큰 경사(?)가 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결국 몇 년 정도 나의 진로를 고민하다가 10년이나 충실하게 다녔던 회사를 퇴사하고 그 퇴직금으로 부산 금정구에 건축사사무소를 개업했다.(만약 건축사 시험에 늦게 합격하여 나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늦추어 졌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눌러 앉아 있다가 지금 쯤 그 대기업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는 임원이 되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업을 한 그 뒤 몇 년도 안 되어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1995년도부터 약 5년 동안 건축사를 1년에 평균 1,000명씩 합격시켜서 5년 만에 건축사가 기존의 2배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1997년에는 우리나라가 IMF의 구제 금융을 받는 국가 경제위기가 시작됐다. 건축사는 배로 늘어났는데 일은 급격히 줄어든 것이었다. 설상가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사무실이 잘 돌아가던 때도 있었으나 내 생활비는 물론이고 직원들 급여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결국 내가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좋은 직장을 전격적으로 그만두고 보란 듯이 개업한 건축사사무소를 쉽게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2005년 7월. 우리 금정구 건축사들 10여명이 의기투합하여 전국 최초로‘아키펌’을 만들었다.‘아키펌’은 변호사들의‘로펌’과 비슷한 개념이다. 원가절감과 대형이미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추구하고 있다. 요사이는 의사들이나 회계사들도 여럿이 모여 그런 경영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 건축사들은 대부분 순수하나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서 동업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아키펌’은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동업형태이므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려움이나 이견이 생길 때는 그 때마다 모여서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를 기어코 만들어 내며 운영해 왔다. 부득불한 이탈자가 있기는 했으나‘아키펌’은 6년을 넘긴 2011년 8월 현재까지도 처음의 설립 취지대로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다.

사무실 운영에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까 2007년부터는 대학에 출강도 하게 됐다. 그리고 2010년에는 우연히 우리 협회의 친환경위원회 위원장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2010년 10월 건축의 날에 운 좋게도 대통령소속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부산・경남・울산에서 발행되고 있는‘건축사 신문’에 1999년 5월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12년이 넘는 세월 동안‘건축만평’을 그리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는 잘 그린다고 제법 인정을 받는 편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었던 그림을 그릴 계획이다. 그리고 또 언젠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다른 성악가들과 함께 연주회를 가지고도 싶다. 그러고 보니 건축사가 되게 한 나의 다양한 재능은 결국 지금에 와서도 여러 가지 다른 부업(?)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다소 어려울지라도 우리 건축사들은 다른 직업에 비해서 본래 재능들이 많은데다가 그 어려운 세월 동안 계속 혹독하게 훈련을 받아 왔기때문에 정말 슈퍼맨 같은 훌륭한 인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건축사들이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역량을 모아서 건축사업무에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발휘한다면 건축사라는 직업은 얼마든지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만능엔터테이너와 친환경이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정말 우리 건축사야말로 인간과 자연을 동시에 이롭게 할 수 있는‘건축문화의 종결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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