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경상도 예안향교의 100년 된 무궁화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로열티를 받고 미국에 수출되고 있다한다. 이미 한국의 종묘도 몬산토 등 세계적 기업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씨앗전쟁에서 완패한지 오래인데, 무궁화 꽃이 한창인 때에 참 반가운 소식이다.
영국의 장미, 일본의 국화 등 전통 있는 국가의 나라꽃이 왕실의 상징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그 역사가 일천한데 비하여 한국의 무궁화는 한민족과 그 역사를 함께 하였다. ‘무리들은 서로 돌면서 춤을 추고 환인을 추대하여 환화(무궁화) 밑, 돌 쌓은 곳에 앉게 하고 줄지어 절하고...’ 발해의 역사서 조대기를 인용한 규원사화의 환인(桓因) 즉위식 장면이다. 환단고기 등에도 “단군께서 제천단 주변에 무궁화를 많이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은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신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 하였다. 기원전에 쓰여진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도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란 글로 이를 확인하고 있다.
▲한국에만 있는 무궁화란 단어는 중국의 목근(木槿)에서 입성음 ‘ㄱ’이 탈락되면서 변한 것으로 추론하고 있으며, 문헌상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집으로 ‘無窮花인지 無宮花인지’ 한자표기로 다투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의 양화소록에서 안사형은 ‘단군이 나라를 여실 때에 이미 무궁화가 나왔기에,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근역(槿域)이라 한다.’며, 무궁화를 다루지 아니한 필자를 꾸짖고, 저자는 이에 대오각성을 한다. 이렇듯 면면히 이어온 무궁화는 일제 강점기에 큰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선열들은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를 넣고, 곳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민족을 일깨우는 표상을 삼았다. 정부수립 후에는 국기봉을 무궁화봉우리로 하며, 대통령 휘장부터 무궁화대훈장에 이르기까지 국화의 위상을 세우고 있다. 무궁화는 조선시대 장원급제자의 어사화, 신하가 임금에게 잔치상을 올릴 때 머리에 꽂았던 진찬화로도 쓰였는바 이는 환인시대 무궁화 꽃을 머리에 꽂은 자를 천지화랑이라 일컬은 데서부터 연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름 정원을 걷는다. 이웃한 6천여세대의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보이는 것은 나무나 풀이나 오직 푸르름뿐이다. 아니 한군데, 풀 꽃 원추리가 주황색으로 피었구나. 하지만 나무 꽃은 없다. 진드기 때문이란 것도, 지금은 수종갱신으로 이유가 될 수 없는데도 무궁화는 없다. 옛 시인은 “봄에 뭇 꽃들과 다투지 않고 / 여름에 유독 홀로피어 / 염천의 쇠를 녹이는 더위와 싸우는 무궁화”라고 노래했다. 학교는 물론 길가, 마당가 그리고 아파트단지에 이르기까지 그 흔하던 무궁화의 이러한 수모를, 과연 조경기술사의 탓으로만 돌려야 할 일인지 자문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