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지만, 언젠가 다시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건축을 공부하고 싶은 게 내 꿈이다. 삶이란, 내 존재를 담아내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 어느 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추상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는 내가 몸담은 사무실, 내 몸의 안식이 되는 집 같은 ‘구체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27년 전, 이맘 때였다. 겨울이라 춥기도 했지만,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 겨울 추위는 참으로 시렸다. 부산에서 올라와 대학에 원서를 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날 밤,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기차가 서서히 서울역을 떠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넓은 서울의 어느 한 모퉁이에, 내가 설 곳이 없다는 서러움이었다. 기차가 달리는 순간, 한강 다리에 늘어선 가로등 불빛들이 등 뒤로 멀어져갔다. 시린 추위 속에, 불빛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보였다. 그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찻간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다시 서울로 올 것이라고, 나를 붙잡아준 건 한강 다리 위에 줄지어서 나를 배웅해주던 그 따뜻한 가로등 불빛들이었다. 오래도록 그 불빛을 잊지 않았다. 이제 서울 생활이,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간보다 더 길어졌다. 타성에 젖는다는 느낌이 들 때는, 내가 서울이라는 공간에 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울며 떠나던 그 추운 시절의 기억, 그리고 그 때 나를 지켜봐주던 불빛의 따뜻함을 되살린다.

6년 전, 파리 특파원으로 발령 받아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추적추적 스산한 겨울비가 내리는 12월의 파리, 어둑어둑한 시각에 파리 외곽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이삿짐은 배편으로 부쳤지만, 당장 쓸 옷가지며, 컴퓨터 등을 꾸역꾸역 이민 가방에 꾸려넣고 낯선 나라에 그렇게 뚝 떨어졌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들어가서 몸을 누일 나의 집도 아직 없었다. 빗길을 헤치고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파리가 빗 속에서 반짝였다. 그날도, 난 그 불빛의 따뜻함이 이끄는 아주 작은 통로를 통해 낯선 세계로 성큼 발을 디뎠다. 거대한 도시는 사람을 압도하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작은 상징, 작은 건축물 하나는 이렇듯 따뜻한 위안과 용기를 주기도 한다.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광화문 앞으로 쭉 뻗은 세종로·태평로 대로다. 내 밥벌이 공간이 있어 매일 출근하는 익숙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 공간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너무나 특별하기 때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땐 출근길이 너무 신났다. 광화문 일대가 거리 응원의 메카가 되어, 회사 가는게 아니고 신나는 축제에 매일 놀러가는 것 같았다. 지난해에는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비감한 역사도 그 공간에 담았다.

매일 아침, 전날 피로가 덜 풀린 채 늘어져 출근하다가도 광화문을 마주보는 대로로 들어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멀리 북악산 봉우리와 복원 공사 중인 광화문이 중첩되는 풍경은 흡사 거대한 스크린을 펼쳐놓은 듯, 스펙터클한 무대를 차려놓은 듯한 위용이다. 양 옆으로 고층빌딩이 도열한 도심의 대로에서, 멀리 600년 도읍의 중심을 바라보면 근대와 현대가 한 줄로 서있다는 연대기의 인상을 받는다. 수도 한복판에 우뚝 솟은 그 봉우리와 툭 트인 하늘이 맞닿은 지점을 바라보면서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의 자연을 압축했다는 느낌도 받는다.

그렇게 한국의 시공간을 축약한 공간의 한복판에서, 나는 매일 아침 뒤통수를 탁 하고 얻어맞으며 타성에 젖은 샐러리맨의 일상에서 깨어나는, 일종의 리추얼(ritual·의식)을 갖는다. 역사와 사회의 한 조각을 기록하는 기자(記者)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감을 그 공간이 내게 말없이 전해주기 때문이다.

파리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수직과 수평의 두 공간인 에펠탑과 샹젤리제 대로다. 그처럼 광화문 앞 대로도 나만의 상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의 상징으로 멋지게 각인시킬까를 혼자 이리저리 궁리하고 상상하며, 설계를 해보기도 한다. “앗, 저 건물은 색이 너무 튀어 이렇게 좀 바꿔봤으면..."하고 마음 속으로 도색을 해보기도 하고, 밉게 툭 튀어나온 건물을 요만큼만 다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도 밉다고 싹 허물고 뚝딱뚝딱 새로 짓는게 낫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질 않는다. 한강의 가로등 하나에도 내 작은 기억이 담겨 있듯, 돌이켜보면 광화문 대로에 늘어선 건물 하나, 가로수 하나하나가 그곳의 일상과 역사를 지켜보며, 우리의 집단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싹 허물어버리는 무자비한 건축은 개선(改善)이 아니라 개악(改惡)이 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프랑스 같은 문화 대국이 되는 길이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간직된 공간 한 귀퉁이, 물건 하나하나까지 조심스럽게 보듬고 다듬는 실력이야말로 역사·문화 대국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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