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국민 행정업무의 간소화를 주장했다. 초스피드 시대, 21세기 최첨단 기술이 한껏 발전한 대한민국이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 너무도 방대한 양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일례로 온실가스 감축에 따른 업무의 확대를 들 수 있다. 탄소시장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 권한을 ‘탄소배출권’이라는 도구로 상품화했다. 국가 간 또는 세계시장에서 배출권을 거래하는 특수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온실가스를 저감할 수 있는 국가나 기업은 배출권 판매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됐다. 반대의 경우 자체적으로 저감하는데 소요되는 비용보다 저렴한 배출권을 구매해 사회 전체적으로 배출량 저감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도 생겼다.
문재인 정부로 들어선 지난 2017년에는 2030년 BAU(Business-As-Usual) 대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37%를 달성하기 위한 이행방안이 발표됐다. 국내에서는 발전, 산업, 건물 등 8개 부문에서 2억1900만 톤(BAU 대비 25.7%)을 감축한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건물부문의 에너지절약계획 관련 건축물 규모가 500제곱미터 이상 건축물로 확대되었고, 수많은 신재생 건축설계 관련 인증과 서류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자 국가 간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대안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선발 개도국 나라들은 이를 잘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작은 나라에서 지켜봐야 새 발의 피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제출하는 설계도서는 어떤가. 필자가 호주의 허가도면을 본 적이 있는데 대여섯 장에 불과했다. 물론 사용승인 이후까지 제출할 서류들이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간소화돼 있다. 국내에서 건축허가를 접수하거나 사용승인을 내려면 부서마다 양식이 다른 서류에 몇 차례 같은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 세움터에 내용을 기록했는데도 종이서류를 스캔하여 또 제출한다. 감리자가 작성하고 인증된 서류에 관계자의 도장을 찍고 또 찍고, 이런 반복된 행위는 불신 사회를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불허(不許)를 전제로 하는 관행, 과도한 제출도서, 아직도 만연해 있는 심의제도의 유착, 중복된 서류, 건축법과 소방법이 상충되는 법제도, 불필요한 인증제도, 시간을 질질 끄는 전국의 허가부서들, 실로 허가가 약속된 만기 날에 보완을 요구하는 뒤통수 행정까지…. 정부가 에너지 절약을 위해 나서야 한다면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나온 수치가 아닌, 단열의 기술을 높이도록 기업을 지원하는 뒷받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지하길 바란다. 두께만 올리면 단열이 잘 된다는 논리는 현시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저항 = 두께(미터) / 열전도율)
앞으로 화재 안전 강화를 이유로 스티로폼 샌드위치패널 생산업체의 줄도산이 우려된다. 플라스틱 창호 업체도 같은 이유로 퇴출되기 직전이다. 에너지 절약을 중요히 여기면서도, 소방을 위해 제도를 바꾸고 있다. 매년 건축비가 오르고 부담은 가중되어가고 있다. 제도를 바뀌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는 맞고 저기는 틀린 제도를 매년 바꿔 봐야 실효성이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2019년 6월 작성한 ‘건축허가 및 심의절차 선진화 방안연구’에서 건축허가 절차의 문제점으로 ‘허가 과정 중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심의에 의한 설계자 의도 훼손, 중복 심의, 심의위원의 자질 및 주관적 심의, 허가 소요시간 예측 불가 등으로 다양한 민원이 발생하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고 진단했다.
도시의 기반을 건축물로 창조하는 건축사들. 건축주와의 상담은 물론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과 디자인에 정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더불어 경기둔화로 인해 생계를 이어가기도 바쁜 이 시국에, 중복되는 서류에 소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다. 건축의 최전선에 서있는 건축사,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