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찬 건축사
강영찬 건축사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만년필을 꺼내 본다. 연필, 수성펜에 익숙해진 터라 잉크리필을 넣고 글을 쓰려 하니 촉감도 이상하고 손에 잡히는 무게감도 다르다. ‘다시 넣어둘까…….’ 잠시 고민하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알기에 애써 외면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사회생활 시작할 때를 생각해보면 건축사사무소에서 작성했던 행정서류는 한글 파일을 출력해서 작성하는 방식이었다. 각 부서별로 도면과 서류를 복사해서 관청으로 들고 찾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변경사항은 붉은색 볼펜으로 선을 긋고 수기로 적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건축사사무소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세움터’라는 프로그램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생소한 프로그램을 접하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우왕좌왕하고 여기저기 전화 통화를 하며 애를 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더디고 실수를 해가며 억지로 익숙해져가는 과정을 지난 지금, 이제는 ‘세움터’ 없이는 행정처리가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작업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청사진에서 프린터로, 투시도에서 그래픽으로, 한글 파일에서 세움터로…….. 되돌아보면 이미 많은 변화를 겪어가면서 이만큼 온 우리들이다. 매번 어색하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이제는 하루도 사용하지 않는 날이 없는 우리들의 일상이 되어 있다. 그래도 하드웨어적인 부분의 변화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틀 안에 있었다. 표현하는 것에 대한 방식의 변화일 뿐!

건축설계와 건축감리. 이제는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 보자. 에너지절약계획서,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BF), 건축정보모델링(BIM), 그린리모델링, 셉테드(CPTED),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석면 철거감리, 건축물 철거감리, 건축물 관리계획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단어이지만 익숙하지 않아 더 이상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게 되는 현실이다. 월간지처럼 바뀌는 각종 법규에 적용 사례도 적어서 주변에 문의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다양한 분야를 접하기도 힘든데, 그만큼 새롭고 낯설기 때문에 할 일이 많은 분야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다양해지는 사회적 요구로 인해 건축 관련 업무도 세분화되고 있다.

앞으로는 반듯한 빈 땅에 신축공사를 하고 감리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건축사의 역할은 건물을 설계하고 감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고 이끌어 가며, 사회적인 안전과 경제발전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다. 그 역할은 4차 산업과 환경, 에너지, 유니버설 디자인, 공간혁신, 각종 안전 등 사회 전반으로 파급되어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역할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은 되돌아보자. 불경기에 코로나19의 장기화로 경제는 더욱 위축되고 있다. 그렇다고 힘들다며 투정만 부릴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만년필을 잡고 글을 써본다.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익숙한 수성펜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수성펜을 바꿔야 할 때가 다가온다면 멋진 만년필을 미리 준비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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