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

- 김성규

  나, 걸었지
  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
  길은 멀고도 먼 바다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뒤를 돌아보았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었지
  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
  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
  깨어보니
  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

 

- 김성규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중에서
  창비 / 2013년

시인들이 시집을 엮을 때 맞닥뜨리는 가장 난감한 사태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시다. 이렇다 할 하자가 없는데 전개가 평범해서 그렇구나 할 것도 없는 시. 그러나 버리기에는 그 때의 자기 모습이 오롯이 똬리 틀고 있어서 버릴 수도 없는 시. 비범한 수사를 동원해 고쳐 쓰면 자기가 아닌 게 되어 버리고, 그냥 두자니 뭔가 미심쩍은 시. 그럼에도 그 시를 과감하게 두는 이유는 그 시가 나였다는 거. 어쩔 수 없는 나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며 새삼 꼭 쥐어보고 싶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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